[ACT! 105호 리뷰 2017.9.11]
슬픔의 쓸모
- <개의 역사> (김보람, 2017)
차한비(ACT! 편집위원)
목포에 갔다. 역전은 무대를 둘러싼 사람들과 깃발로 술렁였다. 광장 입구에서 한 노인이 무화과를 팔고 있었다. 꽃이 없는 과일이란 뜻의 이름이지만 알고 보면 무화과는 꽃뿐인 과일이다. 다만 밖이 아니라 안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베어 물었을 때 입 안에서 터지는 붉은 알갱이들이 실은 전부 꽃의 결과인 셈이다. 노인은 야트막하게 쌓아둔 무화과를 등지고 서서 역에 모인 인파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행진을 했다. 도시는 조용했고 볕은 따가웠다. 몇 개의 구호를 반복해서 외쳤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세월호를 공개하라, 미수습자 가족 품으로.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넜다. 항만에 도착했지만 근처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어려웠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었다. 펜스가 쳐진 입구에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거대한 고철더미 앞에서 눈을 감았다.
▲ <개의 역사> (김보람, 2017)
밀물도 썰물도 감지하지 못한 도시에서 <개의 역사>를 떠올린다. 영화는 물때를 놓쳤거나 또는 물때에 구애받지 않는 낚시꾼처럼 줄곧 인적 드문 한밤 속에 있다. 단순히 시간상 밤에 촬영되었음직한 장면들이 많아서는 아니다. 스크린 가득 푸른색 잎사귀가 흔들거리거나 정오의 눈부신 햇살에 그늘진 그림자들이 아른거린대도, 영화를 보고 있으면 ‘현재’라는 시간을 종종 밤으로 착각하고 만다. 카메라가 꾸준히 아래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의 역사>에서 관찰과 기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대개 바닥에 머물러 있다. 백구가 살던 공터는 백구의 땅이다. 카메라는 백구 가까이 다가가는 대신에 멀리서 백구가 있는 풍경을 담는다. 양지와 음지, 집과 밥그릇, 벽돌과 고무호스. 방해가 되지 않을 위치에서 백구가 있는 세계의 질서를 응시하고 천천히 내려와 수평을 맞춘다. 백구를 돌봐주는 슈퍼 아저씨를 뒤쫓을 때 카메라는 완전히 아래를 보며 뛰다가 겨우 앞선 이의 등을 바라본다. 흔들리고 분절된 화면 속에는 보도블록과 뒤쫓는 이의 풀려버린 신발 끈이 단서처럼 잡힌다.
영화에서 관찰과 기록은 이따금 경청으로 표현된다.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의 증언과 “오랜만이에요” 하고 부끄러운 듯 운을 떼는 할머니의 인사, 그리고 “전적인 이해와 포용”의 실패를 공감하는 음성이 흘러나올 때 역시 화면은 밑을 향한다. 친구의 목소리가 들릴 때에는 몇 계단 아래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감독의 모습을 보여주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릴 때에는 왼쪽과 오른쪽의 높낮이가 다른 걸음걸이를 보여준다. 관계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이름 모를 고양이 한 마리가 감독의 두 발 사이를 서성인다. 그렇게 카메라는 바닥을 향하며 귀를 기울인다.
이때 카메라는 눈앞의 대상을 내려다보는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 앞에서 하강하는 자세 자체로 볼 수 있다. 바닥을 세계 삼아 살아가는 것들, 아래로 몸을 낮출 때 비로소 들리는 것들이 느리지만 무사하게 카메라 안에 담긴다. 그리하여 저녁 무렵 해가 넘어가듯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밤으로 하강한다. 영화가 놓치지 않는 힘 중의 하나는 바로 이 밤의 공기다. 밀물과 썰물이 차례차례 지나가고 파도가 크기를 경쟁하듯 달려드는 한밤중에도 <개의 역사>의 시간은 고요를 잃지 않는다.
영화는 백구라는 개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밤으로의 낙하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 할 일도 없고,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밤. 그러나 때로는 그 밤의 고요가 모든 것의 시작이 된다. 외면당하거나 누락되기 쉬운 밤에 알게 된 어떤 것들은 바다가 보이지 않는 항구도시나 꽃을 품어 맺은 무화과와 닮았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고 부적절하다고까지 여겨진다. 영화는 밤의 끝을 향해, 깊디깊은 바다 속 어둠을 비춰보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간다. 하강은 슬픔을 대하는 자세다. 그리고 슬픔에 처한 자세이기도 하다.
*
슬픔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누군가가 지적하듯 ‘생산적’이지 못하다. 때문에 슬픔은 자주 다른 무엇으로 대체된다. 비슷한 사례와 그럴 듯한 지침이 슬픔을 에워싸고 가만두지 않는다. 슬픔은 나약한 자의 태만으로 치부되어, 적당히 하고 잊을 것과 이겨내기 위해 노력할 것을 강요받기까지 한다. 타인의 슬픔을 구경하는 자들은 곧잘 “나도 그거 뭔지 알 것 같아.” 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거의 이해했다는 말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며, 타인의 우울을 어림잡아 가늠하는 것은 애초에 어긋난 접근이다.
<개의 역사>는 ‘알 것 같다’고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백구를 찍을 때, 사람들을 만날 때,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할 때 카메라는 낯설거나 날이 서 있다. 감독은 어디에 누구와 있든 자기 자신을 유지하며 이방인의 태도로 배회한다. 마치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당신은 나를 모릅니다. 나도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서로 모르는 나와 당신이 잠시 우리로 뭉뚱그려진 채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
영화 속의 슬픔과 괴로움은 그 누구의 것과도 동일하지 않다. 백구의 까진 뒤꿈치는 백구의 것이고, 할머니의 틀린 꿈은 할머니의 것이다. 한 여자는 외로움을 말하고 한 남자는 향수를 웃어넘기며 아이들은 저만치 뛰어간다. 그들은 모두 다르다. 다행히 주인을 잃지 않은 고통은 누군가를 어영부영 위로하려 들거나 성급하게 안도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대상에 대한 어떤 해석도 이입도 허락하지 않으며 그저 계속해서 걸을 뿐이다.
이러한 면에서 <개의 역사>는 소극적인 동시에 무척이나 과감하다. 영화는 타인에 대한 지레짐작을 포기하고 슬픔 앞에서 불가능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행하지 않는다. 더 묻지 않는 쪽을 선택하며 적극적으로 수동의 자세를 취한다. 그동안 카메라를 거쳐 가는 사람들은 원망을 털어놓고 농담을 건네고 별안간 행복하다고 외치는가 하면 생의 한 조각을 두서없이 진술하기도 한다. 백구는 기다림으로 시간을 구분하며 온몸으로 그 기다림을 환대한다. 감독은 늘 그래왔듯이 젖은 빨래를 널어 말린다. 그렇게 깊고 어두운 저 밑, 해저에 가라앉은 무용한 슬픔들이 영화 속에 우연처럼 길어 올려진다.
카메라는 낯설고 날 선 눈빛을 지켜내며 병드는 것들, 늙어가는 것들, 죽어가는 것들, 떠나갈 것들을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한다. <개의 역사>를 보며 슬픔을 체험할 수는 없다. 다만 슬픔을 인식한다.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무엇으로 둔갑시킬 수 없으며 제 슬픔은 저만의 슬픔이라는 단호한 사실을 확인하고 또 확인 받는다. 그 슬픔은 누구에게도 내어줄 수 없고 그 무엇도 비집고 들어올 수 없는 자리다. 영화는 ‘중심’으로 들어설 기회를 끝내 잡지 않음으로써 ‘주변’이라는 슬픔의 자리를 확보해낸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광화문 광장에서도 주변의 위치는 지속된다. 광장의 중심부를 등지고 흩어지는 사람들과 군중을 이탈하여 혼잣말을 하는 사람,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춤추는 사람들의 표정이 카메라에 담긴다. 영화는 수치나 통계가 건너뛰는 개인들을 뒤쫓고, 하나의 거대한 구호에서는 탈락되기 쉬운 무명의 에너지를 마주한다.
여기서 잠시 장면을 돌이켜보면,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 속으로 들어서기 전에 감독이 찾아갔던 곳은 후암동이다. 백구가 살던 자리에 백구는 보이지 않고 공사 중인 현장은 어수선하게 파헤쳐 있으며 거리는 어둡고 텅 비어 있다. 카메라는 제자리에 서서 묵묵히 한 바퀴를 돈다. 그런 다음 이어지는 장면은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광화문 광장 한복판이다. 분노와 환희가 뒤엉켜 거리를 가득 채운다. 이 연결은 묘한 충격을 준다. 지금 없는 것을 기억하는 ‘과거’의 장소에서 지금 있는 것을 포착하는 ‘현재’의 장소로 넘어오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보이는 두 공간은 ‘밤’이라는 시간을 공유한다. 광장에서 카메라는 이해 불가능한 주변과 다시 한 번 조우하며,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이방인의 긴장을 유지한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사건 그대로 바라본다.
따라서 광장의 밤은 최고조에 달한 투쟁의 열기와 한 목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함성을 포함하는 동시에, 그 자체로 도처에 놓인 또 하나의 바닥이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의 현장이기도 하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로 시공간을 이분하지 않으며, ‘지금 없는 것’과 ‘지금 있는 것’을 차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지나간 것, 사라진 것, 죽고 없는 것이 곧 현재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지금 없는 것을 기억하는 ‘과거’의 장소에서 지금 있는 것을 포착하는 ‘현재’의 장소로 넘어”온다는 앞선 문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영화는 끈질기게 현재를 표류한다. 바닥을 관찰하고 슬픔을 기록하는 정처 없는 여정을 통해, 영화는 현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
슬픔은 무력하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무기력하다. 세상의 시간은 시시각각 흐르지만 슬픈 사람들의 두 발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슬픔의 구간이 길어지면 만성적인 우울에 다다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상태에서 누군가는 앓고 누군가는 버틴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뭐라도 해야 할 때 슬픔은 곧 동력이 된다. 감독은 지금 이 시간에 있기 위해 과거의 어느 지점을 한참이나 되새긴다. 그 순간 슬픔은 번번이 정체하던 곳으로부터 돌아 나와 과거형이 된 시간과 관계를 눈앞에 불러들여 대면하도록 이끈다. 감독은 슬픔의 자리에서 카메라를 손에 쥔 채 걸었고 영화는 과거를 디디며 현재로 도착한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영화의 제목이 밝혀진다. 검은 화면, 흰 글씨, 개의 역사. 오래 삼킨 울음처럼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백구의 하루를 기록하듯이 감독은 자신의 과거를, 지금에 이르게 된 기억을 걸러내어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꺼내놓는다. 아버지에 대해서, 이사에 대해서, 불면에 대해서, 붙잡을 수밖에 없던 욕망에 대해서, 자꾸 걸려 넘어지는 두려움에 대해서, 그렇게 ‘개의 역사’를.
부지런히 걷던 카메라는 다시 백구가 머물던 곳, 그리하여 백구가 돌아온 그 자리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이름 모를 사람들이 그 앞을 수차례 지나쳐가고, 과거와 현재는 밤으로 겹친다. 감독은 고백을 마무리한다.
“나는 그곳에서 내가 지켜온 거짓말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아마도 그 거짓말이란 소원의 형태일 것이다. ‘죽고 싶다’ 혹은 ‘살고 싶다’처럼 소리 내어 말하기에는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는 염원.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혼자가 된 밤중에 오래 머무르게 했던 슬픔. 죽고 싶든 살고 싶든 그 어떤 거짓말이든, 결국 거짓이라 할지라도 ‘지켜온’ 동안 그 말과 마음의 자리는 점차 깊게 파였을 테다. 슬픔의 바닥은 영영 아래에 있다. 백구를 땅에 묻은 이는 “생각하기보다 잊음이 중요함을 갖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잊음이 어려워서다. 잊는 고단함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한 마음에 늘 앞선다. 슬픔은 슬프지 않겠다고 애를 쓰는 와중에도 물러나지 않는다. 지켜온 거짓말의 무게 때문에 어떤 밤에는 소원을 비는 사람처럼 자세를 낮추고 이곳저곳을 헤매야 한다. 비록 그것이 제자리를 맴도는 꿈이라고 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역사에 역사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일은 간곡한 사랑이다.
한 사람만 기다리던 백구는 현재를 두 개의 시간으로 나누었다. 가는 시간과 가야만 하는 시간. 사랑하는 이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들의 시간이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 <개의 역사> (김보람, 2017)
먼저 죽을 수 없다면, 첫 번째로 없어지는 쪽이 내가 아니라면 차라리 맨 마지막에 죽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 가장 오래 슬픈 사람이 되어 내 거짓말을 전부 지켜주고 싶었다. 어떤 거짓말은 처음부터 믿을 수 없고 오래도록 적절하지 않다.
목포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긴 시간 버스를 탔다. 자정이 넘어서야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왔다. 밤이 자욱한 도시는 활기가 넘쳤고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태연해보였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어 간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돌아와야만 하고, 떠나간 이의 소식이 갑작스레 들려오고, 사라진 줄 알았던 것이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세상은 더디게 변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완벽한 세상을 모르고, 최후의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도 세상은 불완전하다. 현재라는 아득한 진행형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 곁에 도래한다. 이 슬픔은 쓸모없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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