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104호 이슈와 현장 2017.07.14]
말 있는 사람들의 광장
“광장에서 ‘광장’을 상영하다” 상영회
차한비 (ACT! 편집위원회)
“오래 묵은 나무들이 빙 둘러선 광장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텡일의 명령 한마디로 들장미 골짜기의 모든 사람이 그곳에 모였습니다. 그런데도 광장은 쥐 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그렇게 말 없는 사람들의 쓰라린 슬픔을 누가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옛날에는 서로 만나 즐거워하며 광장에 모였건만, 지금은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 옛날 여름날 저녁이면 춤추고 노래하며 즐기거나 라임나무 그늘에 앉아 온갖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말입니다.” -p.170 『사자왕 형제의 모험』
(사진 설명) 『사자왕 형제의 모험』 p.172-173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삐삐’ 시리즈로 유명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동화로 ‘칼’과 ‘요나탄’ 두 형제가 사후 세계에서 만나며 벌이는 모험 이야기다. 어느 날, 형제가 살고 있는 ‘벚나무 골짜기’에 흉흉한 소식이 들려온다. 평화로웠던 이웃 마을 ‘들장미 골짜기’에 ‘텡일’이라는 폭군이 날뛰면서 마을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형제는 위험을 무릅쓰고 ‘들장미 골짜기’를 향해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남과 자유가 아닌 억압과 침묵의 ‘광장’을 목격한다.
작년 가을부터 겨울, 그리고 마침내 봄까지 내내 폭발하듯 술렁이던 우리의 광장을 떠올린다. 그곳에서는 구호와 함성이 끊이지 않았고, 제안과 비판이 거듭되었으며, 울고 웃는 얼굴이 뒤섞였다. 우리는 광장에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말하고 움직이는 사람들, 결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채웠다.
광장에서 ‘광장’을 상영하다
(사진 설명) 광장에서 ‘광장’을 상영하다
바로 이 광장을 기록한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광장>과 <모든 날이 촛불>이 지난 6월 23일과 24일 이틀에 걸쳐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관객과 만났다. 본 상영회는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기록기념위원회에서 주최한 것으로, 손 높여 들어 올렸던 촛불의 의미를 되새기고 기억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6월 23일에는 박근혜정권 퇴진을 위한 다큐멘터리 영화 프로젝트 제작팀에서 제작한 <광장>을 상영했고, 24일에는 박근혜정권 비상국민행동에서 제작한 <모든 날의 촛불>이 최초로 공개되었다. <광장>은 ‘광장에 서다’(연출 김철민), ‘청소’(연출 김정근), ‘광장의 닭’(연출 황윤) 등 10분 내외의 단편 열 작품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다큐멘터리로서 광장의 다양한 풍경과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모든 날의 촛불>은 그보다 호흡이 긴 세 편의 작품을 함께 묶어내며 작년 10월 29일부터 올해 4월 29일까지 총 23번 지속되었던 촛불의 시간을 깊이 있게 담아내고 있었다.
(사진 설명) 광화문 세월호 광장 입구
(사진 설명) <모든 날의 촛불> 포스터
24일 저녁, <모든 날의 촛불>을 보기 위해 광장을 찾았다. 공기가 눅진하기는 했지만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광화문 역 9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분수대에서 온몸을 흠뻑 적시며 놀고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멀지 않은 곳에 스크린이 설치된 무대와 파란색 간의의자들이 보였다. 스크린 위로는 이런 문장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승리의 광장에 함께 있습니다.” <모든 날의 촛불> 포스터를 받아들고 무대 가까이 다가갔다. 상영 소식을 미리 알고 찾아온 사람들과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주최 측이 준비해놓은 의자 300여 개가 금세 빠듯해졌다.
각자의, 그리하여 모두의 광장으로
김환태 감독이 연출한 ‘광장@사람들’이 <모든 날의 촛불>의 문을 열었다. 영화는 박근혜정권퇴진행동의 박진 공동상황실장과 김덕진 대외협력팀장이 마주 앉으며 시작된다. 광장을 지켜내기 위해 일했던 퇴진행동의 구성원이자, 동시에 그 자신이 광장에 나온 시민이었던 두 사람의 대화는 단순한 승리의 후일담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6개월 동안 진행된 촛불집회를 시간 순으로 조명하며 ‘점화’, ‘열기’, ‘희망’의 3가지 키워드를 통해 광장의 의미와 맥락을 짚어낸다. 이를 통해 영화는 광장에서 성취해낸 승리 그 이상의 것, 즉 “승리한 역사를 경험한 민중의 기쁨”을 주체적으로 기록한다.
한편 ‘광장에서’를 연출한 최종호 감독은 광장에서 마주친 익명의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이곳까지 나오게 되었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조심스레 묻는다. 감독은 비단 광화문 세월호 광장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카메라를 들고 찾아간다. 이 영화에서 시민들이 ‘촛불권리선언’을 만들기 위해 토론하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선언문에 포함되어야 할 문장들을 선택하고 단어를 골라낸다. 이 과정은 광장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을 곱씹고 따지고 정돈하며, 그리하여 그 말들이 단순히 말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북돋아나간다.
(사진 설명) 영화를 보며 손을 치켜든 관객의 모습
<모든 날의 촛불> 세 편의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판결 장면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의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낭독이 각 작품마다 배치되는 시기와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광장@사람들’에서 파면 선고의 순간은 긴 투쟁의 결실과도 같다. 스크린 속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객석에 앉은 관객들 역시 함께 박수를 치고 벅찬 감동을 느낀다. ‘광장에서’는 이 순간 함성의 내부로 들어간다. 언뜻 보면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지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어떤 감정인지 확신하기 어렵다. 파면으로 많은 것이 바뀌겠지만 또한 많은 것이 여전히 그대로임을 상기시키며, 카메라는 도처에 자리한 고통과 괴로움을 찬찬히 응시한다.
그런가 하면 김수목 감독의 ‘일상의 촛불’은 바로 이 주문에서 시작한다. 영화 초반 ‘박근혜 퇴진 이후, 내 삶’을 묻는 청년의 질문은 냉철하고도 절박하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대통령의 교체가 아니라 진정한 삶의 변화이다. 청년은 현재의 움직임이 다른 누가 아닌 그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그 방법이 무엇인지 묻는다. 김 감독은 비정규직 노동자 ‘옥임’, 식당을 운영하는 ‘미순’,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선영’ 세 사람을 통해 광장과 삶을 연결하며, ‘일상의 촛불’의 가능성을 질문한다.
(사진 설명) 궂은 날씨에도 자리를 지키는 관객들
상영회 중반쯤 접어들자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예상과 다르게 비는 그치지 않을 듯했고 앞줄에서 노란색 우비가 건네졌다. 관객들은 자리를 떠나는 대신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나눠 쓰고 영화에 집중했다. 각기 다른 각도와 거리에서 광장과 사람을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세 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객석에서는 종종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왔고 때로는 눈물을 훔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상영을 마치고 변영주 감독의 사회로 GV가 진행되었다. 먼저 세월호 유가족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인사를 전했다. 유가족들은 “힘을 많이 받았다. 영화 보며 우리 가족들의 모습 또한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 자리를 함께 지켜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며, “미수습자 가족이 유가족이 될 수 있도록” 광화문 광장뿐만 아니라 목포와 안산에서 같이 싸우고 있는 가족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부탁했다.
이후 영화를 연출한 김환태 감독과 최종호 감독, 그리고 영화의 기획을 맡은 퇴진행동 넝쿨 전 미디어팀장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변영주 감독은 “감독들이 만든 영화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의 일기장을 편집해놓은” 작품 같기도 하다며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기록”해준 퇴진행동 미디어팀과 감독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사진 설명) 상영회 GV 현장. 왼쪽부터 최황순 수화통역사, 변영주 감독, 김환태 감독,
최종호 감독, 넝쿨 전 미디어팀장, 박진 전 상황실장, 황선희 수화통역사
김환태 감독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세월호 광장에서 첫 상영을 할 수 있어 뜻 깊다는 소회를 전하며, 지난 6개월 동안 이어졌던 촛불 광장의 큰 흐름을 짚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고 연출 계기를 밝혔다. 김 감독은 “작업 기간이 워낙 짧아서 힘들기도 했지만, 역사의 현장에 함께 했다는 긍지로 극복했”다며, 앞으로도 “빨간펜과 카메라를 들고” 사회 곳곳으로 찾아 가겠다고 다짐했다.
최종호 감독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커다란 구호 속에 사람들마다 담고 있는 생각과 의미가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며, 외침보다 그것을 구성하는 작은 목소리들에 귀 기울인 이유를 밝혔다. 최 감독은 하나의 구호만으로는 차마 갈음하기 어려운 깊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광장에서’를 통해 이처럼 온갖 이야기가 “마음껏 뿜어져 나왔던 시간들을 잘 엮어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넝쿨 전 미디어팀장은 감독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과 동시에 영화의 주인공으로 촛불을 들었던 모든 이들을 꼽았다. <모든 날의 촛불>은 광장의 민주주의를 일상의 민주주의로 확대하기 위한,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일상을 광장으로 만들어나가는 방법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라며 관객들에게 “지금 계신 곳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고 일상의 공간을 광장으로 만들어” 주십사 당부했다.
사람답게 살자는 약속, 춤추고 노래하는 광장
(사진 설명) <모든 날의 촛불> 스틸 (시네마달 제공)
자그마치 스물 하고도 세 번이 더 이어진 촛불집회였다. 겨우내 외투가 두꺼워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두텁게 원을 이루었고, 그 힘은 결국 박근혜 탄핵과 5월 조기 대선을 이끌어냈다. 광장은 광화문에만 자리하지 않았다. 사람이 셋 이상 모이면 어느새 그곳은 광장이 되었고, 어디선가 앞 문장을 외치면 누군가 그 다음 문장을 되받았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처럼 긴박하고 뜨거운 시간이었다.
위험이 불 보듯 빤한 상황에서 굳이 들장미 골짜기로 떠나겠다는 형 요나탄을 보며 동생 칼은 상심에 잠긴다.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적과 싸우는 사람이 왜 하필 형이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칼은 요나탄에게 대체 ‘편안히 살면 안 될 까닭’이 뭐냐고 묻는다. 요나탄은 ‘아무리 위험해도 반드시 해내야 되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 칼이 어째서냐고 다그치자 요나탄은 이렇게 답한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지.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와 다를 게 없으니까.”
“이게 나라냐”는 외침은 절규인 동시에 분노에 찬 희망이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은 당연한 마음은 서로의 약속이 되었고, 때문에 용기는 끊임없이 차오를 수 있었다. 우리는 광장을 ‘말 없는 사람들의 쓰라린 슬픔’으로 남겨두지 않았다. 대신 용납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고 진실을 은폐하는 권력에 부끄러운 줄 알라며 소리쳤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서로 어깨를 맞대고 걸었던 모든 곳이 광장이었으므로, 그곳에서 들어올린 ‘모든 날의 촛불’은 광장을 환하게 밝혀냈다. 영화는 더욱 많은 관객들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광장은 이제 막 두 번째 행진을 시작했다. □
● 공동체 상영 안내
- <모든 날의 촛불>은 공동체 상영을 진행하며 세 작품 전체 상영 및 개별 상영이 가능하다.
- 상영절차와 상영료 등 자세한 안내는 배급사인 시네마달 cinemadal.tistory.com / 02-337-2135 로 문의하면 된다.
- <모든 날의 촛불> 예고편 : http://naver.me/xxPRLY2I
[필자소개] 차한비(ACT! 편집위원회)
어려도, 추워도, 가방을 내려놓지 않아도,
아무데나 걸터앉아서도 가능한 것들이
언제까지나 그랬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것을 지켜내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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