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85호 이슈와 현장 2013.9.09]
창작을 위한 원기옥, 크라우드 펀딩
주일(ACT! 편집위원회)
飮水思源(음수사원)
대규모 자본이 오가는 충무로 영화인들은 물론 독립영화인들도 영화를 만들 때는 늘 돈 걱정을 한다. 생계에 대한 걱정뿐만 아니라 제작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창작에 지장을 줄 정도다. 근래 들어 각종 공모전과 제작 지원 제도가 활성화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갈수록 늘어나는 독립영화 제작자들의 수에 비해 자원은 늘 한정될 수밖에 없으니 '독립'영화인들이 지원작 선정을 위해 피나는 '경쟁'을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기업이나 단체의 후원은 어떤가. 박정희 전대통령이 정수장학회에 남긴 '飮水思源(음수사원. 물 마실 때는 근원을 생각하라)'이란 말처럼 일단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을 경우에는 돈 주는 사람의 입김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도저도 싫으면 자비로 찍을 수밖에 없지만 현재처럼 영화를 발표한 이후 수익을 거둘 구조가 전무하다시피한 상황에서 자기 희생과 지인들의 '재능기부'에만 기대어 영화를 제작하는 행위는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무모한 도전이다. 언론에선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의 사례처럼 전세금까지 빼서 '다걸기'하는 사례를 미담처럼 다루지만 모든 독립영화인들이 이처럼 제작을 하다가는 영화가 빛을 보기 전에 빚쟁이가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지속가능한 삶이 담보되어야 영화 제작도 계속 될 수 있을 것 아닌가.
十匙一飯(십시일반)
얼마 전부터 제작비 때문에 고민하던 독립영화인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속속 들려 오고 있다. <26년>이나 <또하나의 가족> 같은 영화가 제작두레란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거나 적지 않은 독립영화의 제작을 위한 모금이 SNS 상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는 것이다. 1만원, 3만원, 10만원 등의 금액을 여러 사람에게서 걷은 뒤 제작에 필요한 목표액만큼 모이면 제작에 들어가고 영화가 완성되면 금액에 따라서 다양한 혜택으로 되돌려 주는 방식은 이제 제법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는데, 다수의 기부자/투자자에게서 비교적 소액의 제작비를 받은 뒤 이를 모아 제작에 들어가는 제작비 조달 방식을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 소셜 펀딩(social funding), 크라우드 파이낸싱(crowd financing)이라고 한다. 이들 낱말을 보면 소수가 아닌 다수의 참여를 기반으로 이뤄지는 행위란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말의 두레와 비슷한 개념이긴 하지만 서로 돌아가며 노동을 제공하기에 모두가 생산자인 두레와는 달리 일정 금액을 기부/투자하면서 아주 적은 지분만을 나눠 갖거나 기부에서 비롯되는 보람 말고는 아무 것도 돌아가지 않는 데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오늘은 십시일반, 티끌 모아 태산,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등의 속담이 잘 어울리는 크라우드 펀딩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크라우드 펀딩(영어: crowd funding/crowdfunding, crowd financing, equity crowdfunding, hyper funding)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해 소규모 후원이나 투자 등의 목적으로 인터넷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다수의 개인들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행위이다. '소셜 펀딩'이라고도 하나, 정확한 용어는 아니다. 주로 자선활동, 이벤트 개최, 상품 개발 등을 목적으로 자금을 모집한다. 여기에는 투자방식 및 목적에 따라 지분투자, 대출, 보상, 후원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 위키백과
창작을 위한 시동 걸기
크라우드 펀딩의 모금 방법은 간단하다. 1) 만들고 싶은 영화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2)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기부/투자할만큼 매력이 넘치는 제작계획을 펀딩 사이트에서 공개한다. 이때 참여자들에게 영화 완성 후 보상 차원에서 돌려줄 '리워드'를 밝힌다. 3) 모금기간 동안 열심히 홍보하며 목표금액을 달성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4) 일정 기간 내에 목표액을 달성하면 펀딩 사이트에서 소정의 수수료를 제외한 나머지 모금액을 제작자에게 전해준다. 미달됐을 경우에는 프로젝트는 무산된 것으로 간주되어 참여 의사를 밝혔다 하더라도 한 푼도 제작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5)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열심히 영화를 만든 후 기부/투자를 한 참여자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보상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금전적인 보상이 돌아가거나 아무 것도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경우에는 금액에 따라 적절한 수준의 '리워드'가 제공된다. 영화의 경우에는 시사회나 DVD, 엔딩 크레딧에 이름 등재 등이 일반적이다. 현재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운용되고 있는 이와 같은 크라우드 펀딩의 모금방식은 미국의 킥스타터(
kickstarter.com)에서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중화를 이끈 킥스타터
킥스타터는 음악을 좋아하던 페리 첸이 돈이 없어 공연이 성사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중 예비 관객들에게 공연비를 미리 받아 행사를 개최하면 어떨까 하는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누군가 시작하고 싶은 프로젝트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목표 금액을 적어 사이트에 올리면 관심 있는 참여자들의 기부를 받고, 모금 목표에 달성될 경우 모인 돈으로 기획된 행사를 추진한다는 기본 개념은 이후 얀시 스트리클러와 찰스 애들러의 합류 이후 좀 더 구체적으로 발전하여 2009년에 킥스타터 사이트를 통해 구현됐다. 처음에는 무료로 운영되다가 안정 궤도에 오른 후 모금 금액의 5%(+아마존 수수료 3~5%)를 받기 시작했는데 2013년 현재까지의 실적은 47676개의 프로젝트를 통해 6억 5600만 달러가 집행되는 성과를 이뤄냈다.(주1)
킥스타터에 올릴 수 있는 프로젝트는 음악, 필름&비디오, 미술, 출판, 공연, 게임제작, 음식, 만화, 사진, 패션, 춤, 기술 등 13가지 분야로 예술 분야가 주를 이루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다품종 소량 제작 시대에 걸맞게 옛날 같았으면 아이디어 수준에서 사장되었을 IT제품이나 게임을 개발할 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목표달성 모금액의 규모는 영상, 게임, 디자인, 음악, 기술 순이고, 공모된 프로젝트의 숫자만으로는 영상, 음악, 출판, 미술의 순서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중 필름&비디오 분야에서는 총 28994건의 프로젝트가 등록되었고 39.92%의 목표달성률을 보였으며 총 1억 3700만 달러가 제작자들에게 전달되었다.
2012년에는 63편의 영화가 킥스타터의 힘을 빌어 극장에서 개봉되었으며 선댄스영화제 진출작의 10%가, 그중 4편의 수상작이 킥스타터 출신 필름이란 이름을 달게 되었다. 또 킥스타터를 통해 모금을 해서 제작되거나 진행중인 영화들이 3년째 킥스타터 영화제란 이름으로 일반 관객들 대상으로 뉴욕에서 상영되기도 했다.(주2) 이처럼 예전 같았으면 힘겹게 제작비를 마련하거나 제작비에 맞춰 규모가 작아졌을 많은 영화들이 킥스타터를 통한 제작비 마련을 통해 극장에 걸리고 관객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도 불어오는 크라우드 펀딩 바람
창작자에게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참여자들에게도 보람을 주는 이런 훌륭한 사업 모델이 한국에서도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몇 년 전부터 킥스타터와 유사한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가 한국에도 속속 생겨났다. 굿펀딩, 텀블벅, 펀듀, 유캔펀딩, 소셜펀치 등 여러 곳의 펀딩 사이트가 생겨 났는데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등록되는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문화/예술 관련 프로젝트이고 영화 제작 프로젝트도 적지 않게 등록되고 있다. 실제로 SNS상에서 각 업체의 이름이나 '펀딩'과 같은 관련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꽤 많은 프로젝트들이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얼마나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지는 공식적인 조사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다.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는 텀블벅에는 그동안 119개의 영화 관련 프로젝트가 등록되었고 이중에서 115개가 마감되었다. 모금에 성공한 프로젝트는 61개로 절반 정도의 성공률을 보였고 대부분은 제작비나 후반작업 지원 같은 직접적인 제작비 마련의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상영을 돕기 위한 성격의 프로젝트도 적지 않았다. 그동안 <환상속의 그대>, <어머니>, <1999,면회>, <지슬>, <자가당착>, <왕자가 된 소녀들>, <모래가 흐르는 강> 같은 영화들이 텀블벅 후원자들의 참여로 관객과 만나 왔으며 지금도 극영화(장편), 다큐멘터리, 단편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분야에서 많은 영화들이 후원을 기다리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적지 않은 프로젝트들이 목표액의 절반에서 10% 이하의 후원에만 성공하여 모금에 실패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앵두야, 연애하자>가 5백 5십 만원의 목표액 중 40만원만 모으며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극장 상영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반드시 크라우드 펀딩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필요는 없고 기존의 방법이나 다른 펀딩 사이트를 통해 동시에 모금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13년 6월에는 씨네21이 주도한 펀딩21이 동참했는데 다른 펀딩 사이트들과는 다르게 한국독립영화협회와 손을 잡고 어느 정도의 규모가 있는 영화들만 펀딩하다 보니 소규모 프로젝트 보다는 김명준 감독, 정지영 감독, 오멸 감독, 박찬경 감독 같은 유명세 있는 영화인들 위주로 모금되고 왔고, 현재까지는 <천안함프로젝트>, <그리고 싶은 것> 등의 프로젝트가 목표액을 초과 달성하며 성공적으로 마감된 것으로 보인다.
진정으로 지속가능한 프로젝트가 되기 위해서
많은 창작자들이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운좋게-실은 엄청난 노력과 준비의 결과겠지만- 대규모의 지원을 받아 일사천리로 제작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희생은 기본이고 주변 사람들을 총동원하고도 모자라서 중간에 엎어지는 프로젝트도 다반사다. 크라우드 펀딩이 제작비 마련에 허덕이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물꼬를 터 준 것은 분명하나 여기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직은 위태로워 보인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종잣돈 정도가 아닌 제작비 전액을 목표로 했을 경우 모금에 실패하게 되면 치명적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비 마련의 여러 방법 중에 하나로 접근하며 현실적인 액수를 목표액으로 책정하는 게 좋을 것이다. 펀딩에 성공한 절반 이하의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목표액의 1/3조차 달성하는 것을 버거운 모습을 보였다.
남의 돈을 가지고 만들 때 가져야 할 책임감도 필수적이다. 펀딩에 성공해서 제작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또다른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을텐데 저예산과 자기 주머니 예산에 길들여져 무계획적이고 불투명하게 예산을 집행하거나 애초 약속과는 다르게 늘어지는 일정 등은 자칫 후원자들에게 기다림과 실망을 안겨줄 수 있고, 최악의 경우에 프로젝트의 무산에 이르기라도 하는 날엔 이후 크라우드 펀딩 자체에 대한 불신감을 조장할 수도 있으니 다른 창작자들을 위해서라도 마지막까지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애초부터 충분한 준비가 된 후에 시도해야 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모금에 실패했다고 제작을 중단할 게 아니라면 조금은 부담감을 떨쳐 버리고 차라리 홍보의 기회로 활용하는 건 어떨까. 크라우드나 소셜이란 말이 나타내듯 과거의 좁은 인맥 속에서 후원을 받던 것을 넘어 모르던 사람들과 불특정다수에게 후원을 받는 일은 금액의 문제를 떠나서 자신의 활동과 작품을 알릴 절호의 기회이지 않은가. 따라서 펀딩 기간 중에 여러 통로를 통해 입소문을 내며 홍보하는 것을 넘어서 모금에 성공을 하든 못하든 자신에게 관심을 표해 준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의미로라도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예전부터 늘 그랬듯이 돈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과 다양한 형태의 지원이 더 필요하기도 하니까.
앞으로 펀딩 업체도 늘어나고 이런 류의 제작비 모금을 계획하는 프로젝트도 늘어날 것이다. 그 속에서 눈에 띄고 성공적인 후원까지 이어지려면 제작자가 이전보다 더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작품 자체의 매력과 완성도를 넘어서 예비 후원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고 모금 이후에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리워드와 소통 방식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영화 DVD를 주고 기념품을 주고 자막에 이름을 넣는 수준에서 벗어나 제작자와 후원자들이 함께 모여 작품에 대한 생각을 나눌 기회를 마련한다던가 다른 제작자들이나 관련 단체들이 연대를 하고 꾸준한 활동을 함으로써 단순히 몇 만원의 돈을 내는 행위가 그저 여느 기부처럼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끊임없이 사회 속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액면가 이상의 가치를 생산해내고 있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다지 새로운 개념도 아닌 크라우드 펀딩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집단지성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각광받고 있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그것은 하나의 작품은 더 이상 한 사람만의 노력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후원과 의견이 어우러져야 온전히 완성될 수 있고, 더 이상 만든 이의 독점적 소유물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누려야 할 재산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비록 지금은 크라우드 펀딩이란 제도가 제작비에 국한된 서비스로 시작하였지만 앞으로는 모금과 홍보를 넘어 공동제작까지로도 발전할 수 있는 소중한 플랫폼이 되도록 여러 사람들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다양하고 많은 작품들이 다수의 참여로 제작되어 대중에게 널리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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