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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84호 이슈와 현장] 밀양, Media Act,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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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3. 7. 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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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84호 이슈와 현장 2013.06.30]
 
밀양, Media Act, 카메라
 
현 (ACT! 편집위원회)
 
 
  한전의 폭력적인 공사재개가 시작된 지 며칠 후 카메라를 챙겨 부랴부랴 밀양으로 내려가면서 ACT! 편집위원회로부터 ‘간 김에’ 밀양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디어 활동가들에 대한 글을 써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가능도 하겠다는 생각에'  “오케이”를 외치고 내려갔지만, 배치된 곳을 떠날 수 없어서 밀양 4개 면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게다가 내려간 지 이틀 만에 ‘휴전’이 협정되었고, 그러자마자 지체 없이 귀경해야 할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은 스스로를 미디어 활동가로 생각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 처음으로 카메라를 짊어지고 기록과 알림의 의무를 자각하며 분쟁 지역에 (약간은 비장한 심정으로) 가서 경험하고 느낀 것 위주로 쓰고자 한다. 초보 미디어 활동가의 체험기라고나 할까. 유별난 일을 겪은 것은 없지만, 사소한 경험에서도 끌어낼 이야기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애초에 편집위원회에서 기대했던 미디어 활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면, 나는 그저 이들의 순수한 의지와 실천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는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영상을 찍고 편집하는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작년 여름부터 간간이 밀양에 내려가 현장을 기웃거리던 나는, 주요 언론에서 전혀 다루지 않는 밀양 사태를 알리기 위해 영상팀이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영상팀은 전국에서 모여든 영상 활동가들로 조직되어 있으며, 수가 그리 많지는 않으나 단 하루도 공백이 없도록 계획적으로 짜여 있다는 것, 단 한 명이라도 이들이 함께 있어주는 것이 (밀양의 그 유명한) ‘할매들’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영상팀 가동은 어느 한 미디어 활동가의 의지와 리더십과 광범위한 인맥 덕분에 가능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미디어 활동가들도 다 천차만별이어서, 이번에 내려간 나처럼 아무 명함 없는 일회성의 초보 활동가가 있는가 하면, 미디어운동 관련 명함을 박고 전문적으로 이 일을 해내는 노련한 활동가도 있고, 보도보다는 다큐멘터리 작업에 더 관심이 많은 활동가도 있다는 것도 알았다. 공통된 게 있다면, 정의에 대한 갈구와 열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리라. 좀 간지럽지만, 거기 있는 그들은 그렇게 보였다. 
 
***
 
  주섬주섬 캠코더를 챙기고 배터리 양과 외장 하드의 남은 용량을 걱정하며 내려갈 때 나는 나름대로 미디어 활동가로서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일지 생각했다. 밀양의 현장은 이미 내게 익숙했고 미디어 활동가들의 어깨 너머로 본 것도 적지 않아서 그리 막연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첫째, 당당하기. 정식 ‘미디어 활동가’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내게 힘이 되었다. 예전에는 ‘적’(한전)이 ‘넌 누구냐’고 물으면 대답이 궁했었다. 주민도 아니고 대책위원회 사람도 아니고 활동가도 아니고. 그래서 ‘적’이 ‘누군데 함부로 사진을 찍느냐’고 엄포를 놓으면 ‘기자다...’ ‘어디 기자냐’ ‘인터넷 신문이다...’ ‘신문사 이름이 뭐냐’ ‘...’ 자신 없는 말투로 즉석에서 신문사 이름을 매끄럽지 못하게 지어내고 있으면 스스로 거짓말임을 고백하는 거 같아서 진땀이 났었다. 이제는 당당히 말하겠다. ‘나 대책위 영상팀이오!’
 
  둘째, 당당하고 침착하기. 만일 사건이 벌어진다면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고 나는 생각했다. 어느 포인트에서 뭘 찍을지 판단하고 거침없이 찍는다. 그들이 내게 다가와서 카메라를 뺏거나 나가라고 하면 ‘나는 대책위영상팀이며 주민의 안전을 보호 하기 위해 여기 있어야 한다.’고 맞서 싸운다. 그들이 할매들에게 어떤 물리력을 행사하면,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을 자제하고 그 장면을 찍는 데 최선을 다한다(사실 직접 행동에 나설 자신도 없었다...;;). 
 
  셋째, 최대한 주민들을 이해하려 하기. 위의 ‘당당하기’도 어렵지만, 이것도 내겐 어려운 과제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빠른 경상도 말을 태반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내게 경상도 말이란 TV 드라마에서 탤런트들이 하는 말이었다. 밀양 산골 마을에서 싸우는 듯 한 할매들의 속사포 같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TV의 사투리는 진짜 사투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할매들의 말은 내게 @#$!&\?%#????일 뿐이다. 할매가 나를 보고 뭐라뭐라하면서 웃으며 내 반응을 기다릴 때가 나는 가장 곤혹스럽다. 그럴 땐 대충 미소를 지어 보이지만, 내가 생각해도 어색하여 또 ‘거짓 미소’라고 이마에 새겨질까봐 이중으로 곤혹스러워진다. 최대한 대화에 집중하기. 어제인지 그저께인지 알 수 없는 ‘아래’ 같은 단어는 포기하더라도, 빠른 말투는 최대한 집중하면 조금은 더 들리니까. 
  (여담 하나 하고 넘어가면, 대화에 수시로 나오는 ‘아래’는 특히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라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지만, 어제인지 그저께인지 아니면 사나흘 전인지 알 수 없었다. 한번은 어느 할매한테 ‘아래가 어제예요, 그저께예요?’ 하고 물었다. 대답은 동문서답. 할매는 내 질문을 못 들은 게 아니라 이해할 수 없었던 거다. 정식으로 앞에 앉혀놓고 정색을 하고 묻지 않는 이상, 그런 질문이 있다는 것도 예상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안 들리는 질문이었던 거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할매들이 ‘아래’라고 할 때 언제를 지칭하는지 모른다.)
 
  넷째, 상황을 파악하기. 늘 상황 파악이 늦은 나는 찍어야 할 것과 안 찍어도 될 것을 구분 못하거나 찍어야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거나 찍기 위해서 어디로 갈지 모른다거나 왜 찍는지 모르고 찍는다거나 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일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판단하는 것은 렉(REC)버튼을 누르는 것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다. 사방 관심의 촉수를 세울 것.
 
▲ 밀양 단장면 84번 공사 현장. 벌목된 산등성이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
 
  대충 이런 생각을 하며 늦은 밤, 밀양에 도착했다. 다음날은 하루 종일 비가 와서 한전 측에서도 공사 시도를 하지 않았고 주민들도 막으러 가지 않은, 주민들에겐 모처럼의 휴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배치된 곳 정해진 숙소에서 하루 종일 누워 뒹굴면서, 하루 늦게 올 걸 하는 후회와 여기까지 와서 무위도식하고 있다는 조급한 마음이 생목 오르듯 올라오는 것을 자꾸 삼켜내야 했다. 나를 위해서 여기 있는 게 아니니까. 내가 활동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게 아니고 내 활동이 필요할 때 응하기 위해 여기 있는 거니까.
  저녁부터 비가 그쳐 다음날은 새벽 3시에 할매들과 함께 산에 올랐다. 새벽에 산을 올라 언제 나타날지 모를 인부들보다 먼저 진을 치고 맞설 준비를 해놓는 것, 이것이 주민들이 매일 하고 있는 투쟁 일과의 시작이었다. 물론 날이 춥지 않고 비가 안 온다면 아예 산 속에서 자며 24시간 현장을 지키기도 한다. 
  산 속 현장에 도착하니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길을 가로막고 있는 육중한 포크레인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인다. 할매들은 각자 가방에서 비닐을 꺼내더니 젖은 땅에 놓고 퍼질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앉을 데 없이 섰다가 어느 할매가 건넨 신문 쪼가리를 깔고 앉아 엉덩이가 다 젖어버린 나는 새벽의 추위 속에서 어찌할 바 없이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할매들은 더할 수 없이 긴요한 준비물(비닐)과 이야기꽃으로 이 막막함을 수월하게 보내고 있는 듯했다. 
 
  “우리 아들은 전화 한 통 없다, 엄마가 이러는 걸 아나 모르나.” 
  “사람들이 나더러 빨치산이라 칸다.” 
  “빨치산이 뭐꼬?” 
 
  하릴없이 카메라를 돌리다 라이트 때문에 배터리가 닳는 게 걱정이 되어 끄곤 하던 나는 이런 대목에서 카메라를 켜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
 
  날이 밝아 주변의 지형지물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높은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간 현장 동영상 등을 보면서 저들이 인간 방패막이를 하면 내 키로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인간 방패막이 그 뒤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찍어야 했다. 마침 그곳은 산등성이를 깎아 만든 길이었고, 길옆에는 깎여나간 산등성이가 어른 키만큼의 높이로 있었다. 나는 그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점심 먹으러 내려올 때까지 계속 그 위에서 카메라를 아래로 조준하고 있었다.
  나는 그날,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낱낱이 찍으리라 작정하고 있었던 거 같다. 한 마디로, 긴장하고 있었다. 왜 아니겠나, 그날은 뭔가 일이 벌어지리라고 예상되던 날이었다. 
  단장면 고례리 바드리마을 85번 철탑 부지. 다른 현장들과 달리 800미터가 넘는다는 고지대 깊은 산중에 위치해 있어 그만큼 고립감이 크고, 그래서 지키러 오는 마을 주민이 다른 곳보다 적어 ‘병력’이 딸리는 곳. 전전날, 바로 이곳에서 포크레인을 가로막고 저항하던 할매들을 한전 측이 물리력으로 진압했고, 그날따라 현장에 카메라가 없어 그 폭력의 현장을 기록하지 못했다. 아니, 카메라가 없어서 더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카메라부터 진압됐을까?
  그 일이 있은 다음날은 쏟아지는 비로 공사 시도를 하지 않았고, 비가 갠 바로 오늘, 다시 ‘결전’이 있으리라는 예상이 나를 더욱 긴장시켰다. 
 
  한전 직원인 듯 한 수상한 남자가 아침 7시쯤 정탐하고 간 것을 시작으로, 8시경이 되자 다섯 명의 인부들이 우리를 지나쳐 공사현장으로 들어갔다. 할매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한 어매가 포크레인 아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 쇠사슬로 포크레인과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채운다. 그 앞에 한 할매가 다시 밧줄로 그 어매의 몸과 자신의 몸을 묶고, 나머지 세 할매들은 서로의 몸을 밧줄로 연결하고 뒤의 할매와도 연결하여 단단히 묶는다. 이로써 굵은 밧줄을 끊지 않고는 한 할매를 끌어내면 포크레인까지 줄줄이 딸려 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 (왼쪽)서로의 몸을 밧줄로 묶고 있는 할매들.
▲ (오른쪽) 포크레인 아래 가장 안쪽에서 포크레인과 자신의 몸을 쇠사슬로 단단히 동여매고 버티고 앉아 있는 어매.
 
 
  얼마 후 한전 측 대장인 듯 한 자가 와서 포크레인 아래에 또로록 앉아 있는 작은 할매들 앞에 쭈그리고 앉아 밉살맞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할매들, 나오소. 거 기름 떨어지는데(포크레인 아래에서는 기름이 할매들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다). 오늘은 안 들어낼게.”
 
  다시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 서넛과 여자 한 명이 등장한다. 한전이 이른바 구급차와 함께 현장마다 보내고 있는 ‘광고용’ ‘사이비’ 의료진이다. 여자는 한전 소속 의무실의 간호사가 맞다. 하지만 자칭 ‘간호 보조사’라고 하는 남자 서넛은 무슨 용도?
 
  “할매들, 몸 안 좋은 데 있나예?”
 
  대장이 걱정해주는 투로 말하자, 한 할매가 쏘아붙인다.
 
  “몸 불편하면 우리가 그쪽 치료 받겠는교?”
  “아따 그 할머니 참.”
  “죽어도 우리는 그쪽 치료 안 받습니다!”
  “그래예..., 허허” 
 
  대장은 몇 번 헛웃음을 치더니 가버렸다.
 
▲ “할매들, 몸 안 좋은 데 있나예?”
새벽부터 축축한 바닥에 앉아 포크레인을 지키고 있는 할매들에게 한전이 짐짓 걱정해주는 듯 묻는다.
할매들 반응은 냉랭했고, 곧 그는 갔다.
 
 
  맥 빠지게도(?) 이것이 그날 일어난 ‘사건’의 전부였다. 그 이후에는 한전 측 사람들이 몇 번 왔다 갔다 한 것 말고는 그 어떤 공사재개 시도도 없었다. 한전 쪽보다는 울산에서 결합한 활동가들, 스님들, 시민연대 대표들 등 우리 측 방문자들이 끊임없이 오갔는데, 그 덕분에 한전이 오늘 손을 대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대책위에서 알리는 인상적인 말 중에, 이 싸움이 승산이 없다거나 있다거나 하는 거시적 전망은 지금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직 중요한 것은 주민들이 하루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것이고, 외부에서 오는 방문자들이 많으면 한전이 함부로 일을 벌이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을 바로 실감한 날이었다. 그리고 주민들이 하루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것이 전체적인 승산을 따지는 것보다 왜 더 중요한가도 나는 알았다. 할매들 곁에 있어보니 알았다. 몇 시간 잠도 못 자고 새벽에 찬 이슬을 맞으며 산을 올라온 근심어린 할매들의 가장 큰 소원은 그날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가 막막할 만큼 괴로운 나날, 그것보다 더 큰 소원은 없었다.
 
***
 
  긴장감에 카메라를 든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간 나는, ‘적’이 나타날 때마다 빠짐없이 카메라를 돌렸다. ‘적’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을뿐더러, 별로 좋지 않은 행동이었다. 적이 있다면 한전이지, 한전의 녹을 먹고 살아야 하는 그들을 적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적’을 노려보는 내 카메라 렌즈는 그들을 경계하게 하고 쓸데없는 마찰을 일으킨다. 특히 이런 현장에서 사람들은 카메라에 잔뜩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저들은 주민들을 채증(고소용으로 얼굴을 찍음)하고, 우리는 저들의 폭력을 알리고 고발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한전의 누군가가 내 쪽을 보며 불쾌한 투로 소리를 지른다.
 
  “찍지 마쇼, 거. 왜 자꾸 찍습니까.”
 
  갑자기 카메라를 든 내 팔이 머쓱해진다. 그의 항의가 맞다는 것을 순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폭력을 쓰지도 않았는데 찍힌다면 나라도 불쾌했을 것이다. 무슨 기념촬영도 아니고 말이다.
  나의 두려움에서 오는 긴장감은 주변 사람들을 더불어 긴장시키고 경계하게 하고, 그래서 마찰을 빚는다는 것을 나는 그때야 깨달았던 것 같다. 울산에서 결합한 어느 활달한 여성 활동가가 한전 측 사람과 부드럽게, 그러나 솔직하게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괜한 적개심으로 뭉쳐 있는가를 깨달았다. ‘처음이잖아, 그러니까 다 기록해둘 필요가 있지....’ 내 자신한테 이런 변명도 해보지만, 여유라곤 갖지 못한,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데 혼자 벌벌 떨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내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우스운 일화까지 남겼다. 한전 측 사람들이 가자마자 무서운 인상의 ‘깍두기’ 같은 남자와 역시 험상궂어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서 할매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화면으로 노려보다가 “어디서 오셨어요?” 하고 물었는데, 나도 모르게 말투가 심히 딱딱했나 보다. 머리를 빡빡 깍은 그 ‘깍두기’가 나를 돌아보며 “울산이요” 했는데, 울산에서 활동가들이 결합한다는 사실도 생각 못 할 만큼, 아니 생각은 했지만 울산에서 온 한전이라는 생각이 너무 커서 “울산 어디 소속이세요?” 하고 또 돌멩이보다 더 딱딱한 소리로 물었다. 그 둘이 좀 불쾌해하는 게 보였고, 이번에는 머리 빡빡이가 아닌 다른 남자가 침착하게 설명하려 노력하며 울산 어디어디 소속이라고 말했다. 그 몇 초 후에야 나는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면서 그들이 울산 활동가들임을 알았고, 그 높은 곳에서 진심으로 사과해야 했다. “아유, 너무 무섭게 생기셔서...” 좌중이 웃었고, 이 에피소드는 그들 입을 통해 전해져, 그 자리에 없던 다른 울산 친구들에게까지 퍼져 웃겨주었다는... 왜냐하면 내가 ‘깍두기’라고 한 그 남자는 울산 비정규직지회의 노동자로, 실제로 인상이 좀 험해서 한전 직원들조차 자기네 용역인 줄 안다는 에피소드를 달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
 
  나는 전부터 이렇게 찍는 무수한 영상이 어디에, 어느 사이트에 보여지고 있는가를 쉽게 묻곤 했다. “어디다 올려요?”
  그러면 영상 활동가들은 어디에 올린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대충 눌러보는 식의 내 검색 스타일로는 별로 많이 잡히지 않았다. 또 그들은 ‘카메라가 현장에 있는 것 자체가 주민들에게 힘이 된다.’고 말해주었지만, 그 또한 실감이 되지 않았다. 카메라가 뭐... 앞을 막아서줄 장정이 더 힘이 되겠지. TV를 타는 것도 아니고... 늘 이런 생각의 폐쇄회로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날, 나는 그 산중까지 따라온 카메라에 할매들이 안도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할매들은 사건이 일어난 그 전전날, 울산 활동가가 폰으로 찍으려 했지만 곧 들려나갔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으며, 나와 내 카메라에 대해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나의 존재를 너무나 당연시하고 있음을 나는 느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육감으로, 분위기로, 나는 알 수 있었다. 내 카메라가 할매들에겐 일종의 보호막이며 이 산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세상이 알아줄 것이라는 든든한 징표임을.
 
  작년 여름, 괜시리 DSLR 카메라를 목에 걸고 밀양을 들락거렸던 어느 하루가 생각났다. 그즈음 나는 주민들 사이에 ‘기자’로 오해되고 있었다. 밀양에 상주하며 현장을 찍고 영상을 만들어 올리던, 주민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는 어느 PD 곁을 졸졸 따라다닌 덕분이었다. 그의 곁에 있는, 카메라를 목에 건 나도 당연히 취재기자일 거라고 주민들은 생각해주었다. 처음 몇 번은 “그게 아니고요...” 하며 설명을 하려 했지만, 그게 아니고 뭐다, 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었던(그냥 아무 직함도 없는 개인이었으니까) 내 설명은 지지부진해지기 마련이었고, 주민들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중에는 에라, 무슨 상관이냐, 하며 어르신들이 “기자님, 기자님” 하면 그냥 “네 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밀양 싸움의 전설로 남아 있는 2011년 겨울, 그 할매들의 눈물 나는 싸움의 현장, 부북면 127번(이던가?) 현장에 혼자 갔다. 현장 아래에 있는 감시 막사에는 주민 대책위원장이신 어르신과, 곧 쓰러질 듯 자그마하고 여린 몸집으로 누구보다 힘차게 싸워냈던 어느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는데, 나를 보시더니 대책위원장님이 그 할머니께 ‘기자님을 데리고 가서 현장을 보여주라’고 말씀하셨다. 마침 글로만 접하고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했던 그 유명한 현장을 보고 싶었던 나는 냉큼 할머니를 따라 나섰다. 할머니는 산길을 구불구불 앞장서서 가시더니 차례로 나타나는 천막부터 하나하나 비닐을 들치시고는 내부를 일일이 설명을 해주셨다. 불을 때는 온돌, 밥을 해먹었던 그릇들, 천막에 걸어놓은 누런 달력... 그리고 신부님이 안에서 주무시고 계신다고 용역들에게 거짓말을 하며 무사히 지켜냈던 일명 ‘신부님 천막’, 그 전쟁 같은 와중에도 키워 먹으려고 할매들이 심은 호박 넝쿨까지... 넝쿨에는 자그마한 호박이 달려 있었다.
 
  이어 할머니는 천막을 지나 뻗어 있는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오르막이 바로 한겨울, 할매들이 나뭇가지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수없이 미끄러지며 오르내렸던 그 비탈길이다. 그리고 곧 벌목되어 탁 트인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벌목되기 전에는 빽빽한 숲이었는데 그나마 이 정도 나무가 남아 있는 것은 할매들이 나무를 부둥켜안고 지켜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나무마다 아래쪽 기둥에는 베다 만 톱질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할머니는 여기저기를 가리키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끊임없이 설명을 이어가셨다. 여기서 뭐를 했다, 여기서 어떤 일이 있었다, 이것은 어떻게 하다가 생긴 것이다... 등등. 
  할머니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면서 높아지는가 싶더니 곧 울먹이셨다. 이 초등학생 몸집의 여리디여린 할머니는 수십 년 전 깊은 병이 들어 밀양의 숲을 찾았고, 맑고 깨끗한 밀양의 자연의 힘으로 치유되어 지금까지 밀양을 고향보다 더 아끼며 사신 분이었다. 이분에게 밀양 송전탑은 청천벽력이었고,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밀양의 나무들을 지켜내기 위해 그 겨울 그 험난한 싸움을 해내셨다. 그 할머니가 지금 내 앞에서 울먹이며 이 사실을 꼭 세상에 알려달라고 기자님에게 호소하고 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기자도 아니고 기껏해야 주위 한두 명에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세상에 알릴 힘이 없고 그땐 내가 아니어도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으며, 나는 그저 그 유명한 얘길 듣고 한 번 보러 왔을 뿐이다. 내가 그런 줄도 모르고 할머니는 제발, 제발 이 사실을 알려달라며 눈물로 내게 호소하고 있다...
 
  나는 진실을 말할 틈도, 그것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고 “꼭 알릴게요, 걱정 마세요.”라고 힘 빠진 말을 몇 마디 주절거렸다. 그리고 마치 기자인 양, 몇 장의 사진을 찍느라 찰칵거렸을 뿐이다. 이 사진이 세상에 나올 일은 없으며, 이것보다 더 현장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진들은 이미 많으며, 이 별 볼일 없는 사진들은 내 하드에 저장되고 끝일 뿐이라는 생각이 무기력함과 창피함과 민망함, 그 자리를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 등과 뒤섞여 머리가 거의 하얘졌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일도 곧 잊혔다. 내가 영상 촬영과 편집을 배우기로 했을 때도, 배우고 있을 때도, 나는 한 번도 이때의 일을 생각한 적이 없다. 그날, 85번 현장에서 진짜로 카메라가 존재만으로도 할매들에게 힘이 된다는 것을 느꼈을 때, 1년 전 그 부북면 할머니의 울먹임이 생각났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라면 자행되고 있는 불의와 범죄와 이 지옥 같은 싸움을 무조건 세상에 알릴 수 있고, 세상은 우리의 억울함을 알아주어 그에 합당한 보상과 처분을 해주리라는 할머니의 굳은 믿음이 생각났다. 찍기만 해서는 안 된다. 어디에든, 어떻게든 만들어 올려야 한다. 저 할매들은 여기 있는 이 카메라를 통해, 자기들이 본 것을 세상이 곧 똑같이 보게 될 거라고 믿고 있다. 찍고 나서 영상팀을 총괄하는 사람에게 파일만 넘겨주면 되겠지, 하고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나는, 아니 찍는 거 그 자체에만 너무 신경을 쓰고 그 이후를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는 짧게라도 영상을 만들어 올리기로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영상팀 총괄자가 지시하고 있는 바이기도 했다. 
어디에? 그건 어려운 문제다. 밀양 송전탑 카페에부터 올린다. 아무도 안 본다고 투덜대지 말고, TV가 아니라고 네이버 대문 페이지가 아니라고 상투적으로 좌절하지 좀 말고.
 
  
▲ (왼쪽) 일명 ‘신부님 천막’을 설명하고 있는 부북면 할머니. 신부님이 이 안에서 주무시고 계신다는 말로 용역들을 막아냈던 작은 천막이다. 마음 졸이며 거짓말로 며칠을 버텼던 할머니들의 절박한 마음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 (오른쪽) 부북면 127번(?) 벌목 현장. 이때쯤 할머니는 울먹이며 이 사실을 꼭 알려달라고 ‘기자 양반’에게 호소하셨다.
 
 
***
 
  점심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책위원장님이 오더니 40일간 공사 중지가 결정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할매들과 나는 함성을 질렀다. 우리는 서로 껴안았다. 껴안고 서로 등짝을 탁탁 치고 부비대지 않고서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곧 자리가 정리되었다. 포크레인에서 떨어지는 기름으로 다 망가진 냄새 나는 옷을 입고 할매들은 포크레인을 떠났다. 완두콩 따야 한다며 새벽부터 끌탕을 하던 할매들, 일손 도우러 농활대 언제 오냐고 이장에게 묻던 할매들은 이제 발걸음도 가볍게 콩 따러 밭으로 갈 것이다.
 
▲ 40일간의 휴전 소식을 듣자마자 산에서 내려왔다. 
마을 회관 앞에서 ‘만세’를 외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할매들.
 
 
  40일간의 휴전 이후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많고 나 역시도 그렇지만, 저 할매들은 아랑곳없이 40일이면 농사 다 끝난다고, 그다음부턴 얼마든지 전투를 치를 수 있다는 투로 활기가 넘친다. 현장은, 뭔가 다르다. 밖에서 옳다고 생각한 것이 현장에선 그를 수도 있고, 밖에서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 현장에선 옳을 수도 있다. 무척 헷갈린다. 밖에서 휴전 소식을 들었다면 옆 사람을 덥석 껴안을 정도로 그렇게 기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뭔가 단순하고 명쾌해진다. 현장에 있으면, 누가 조목조목 대며 그렇다고 주장해도, 아니라고 대뜸 외칠 수 있을 것만 같다.
  미디어활동가로서의 나의 첫 경험, 단 하루의 경험은 다행히 이렇게 기쁘게 끝났다. 40일 후에 다시 두 번째 체험기를 쓰지 않게 되길, 제발 바란다. □
 

 

[필자소개] 현(ACT!편집위원회)

- 촬영과 편집, 다큐멘터리 제작, 미디어운동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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