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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0호 이슈와 현장] 박종필 1주기, 어떤 액티비즘을 고민할 것인가 - 故 박종필 감독 1주기 추모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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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8. 7. 1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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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0호 이슈와 현장 2018.07.31.]


박종필 1주기, 어떤 액티비즘을 고민할 것인가
- 故 박종필 감독 1주기 추모포럼

성상민(ACT! 편집위원)



▲ 지난 7월 말, 박종필추모사업회의 주최로 故 박종필 감독의 1주기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추모포럼은 그 일환으로 개최된 자리였다.


  박종필 감독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1998년 <IMF한국, 그 1년의 기록 – 실직노숙자>로 데뷔했던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수많은 현장을 카메라를 들고 종횡무진했다. ‘노숙인’과 ‘홈리스’로 상징되는 빈곤 문제로 독립 다큐멘터리의 길에 뛰어들었던 박종필은 카메라의 시선을 장애인 문제로 넓히게 되었고, 2014년부터는 세월호 참사의 문제에도 초점을 맞췄다. 직접 연출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작품이자 유작으로 남게 된 남태제 감독의 <길>은 지난한 과정을 겪은 상지대 민주화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박종필이 관심을 보인 주제는 무척이나 다양했지만, 그 주제들은 결국 ‘한국 사회의 취약점’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빠른 속도로 급성장했지만, 그러기에 지켜야 할 수많은 가치들이 쉽게 방치되었던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박종필은 카메라를 무기로 함께 싸우고 연대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박종필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은 무척이나 중대한 사건이었다. 제대로 쉴 틈 없이 무수한 현장을 카메라로 함께 한 이의 빈자리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그가 세상을 떠난 전후로 벌어진 미디어 활동가들의 온갖 궂긴 소식들은 미디어 운동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하고 개인의 희생에 의존하는지를 절감하게 만들었다. 한편으로 그의 죽음은 한동안 각자도생하기에 바빴던 미디어 액티비즘의 행보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박종필이 생전에 남긴 가치를 계승하는 동시에, 결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짐한 이와 단체들이 뭉쳐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박종필추모사업회(준)’을 만들었다. (이하 ‘추모사업회’) 추모사업회는 박종필 감독을 추모하는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지난 7월 27일, 대학로에 위치한 ‘콘텐츠 코리아랩’에서 박종필 감독의 1주기를 추모하는 포럼 <박종필의 카메라 이것이 액티비즘이다!>가 개최되었다.



다양한 영역에 발자취를 남겼던 영상활동가, 박종필



▲ 포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현장은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포럼이 시작하기 전부터 행사장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평일 낮 시간대 포럼이 개최된 것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많은 이들이 박종필 감독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포럼을 진행하기에 앞서 사전 행사가 진행되었다. 사전 행사에는 고인이 활동했던 다양한 영역을 대표하는 이들이 여는 발언을 남겼다.

  세월호에 탑승한 단원고 학생의 유가족이자, 꾸준히 온라인을 통해서 세월호 참사에 관련된 소식을 전해주는 ‘416TV’의 운영자인 문종택 씨는 박종필 감독이 항상 카메라와 같이 현장을 함께했던 사람이라 말했다. “정부합동분향소 천막 앞에서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의 소개로 박종필 감독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박종필 감독은 언제나 한 발짝 뒤 떨어져 현장을 함께 었어요. 단순히 현장과 멀리하려는 선택이 아니라 오랫동안 현장에 남아 함께하려는 선택이었습니다. 카메라는 보통 움직이는 피사체를 계속 추적하려 하는데, 오히려 박종필 씨는 피사체가 벗어나도 뒤쫓지 않도 계속 그 자리에 머무르더라고요. 혹시라도 모습을 비출 진실을 담아내기 위해 계속 같은 앵글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의 대표를 역임하고 있는 고영재 프로듀서는 이번 추모 포럼을 통해 고인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고민하는 길이 진정 고인을 계승하는 길이라 말했다. 덧붙여 그와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였다. “생전에는 박종필 감독하고 많이 싸웠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가 떠나고 나니까 빈자리가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최근 활동이 끝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에 활동하면서 박종필 감독이 블랙리스트에 등재되어 있던 사실까지 알게 되니 더욱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자기 작품이 지원을 받지 못한 것에 얼마나 힘들어 했을까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이형숙 소장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대표이자 추모사업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 박경석 활동가도 장애인 운동에 헌신했던 박종필 감독에 대한 이야기로 여는 발언을 장식했다. 이형숙 소장은 전국 순회 투쟁을 할 때 박종필 감독에게 투쟁 현장에서 상영할 영상 제작을 부탁하며 생겼던 이야기를 꺼내며 고인과의 인연을 말했다. 박경석 대표는 최근 세상을 떠난 노회찬 국회의원에 대한 소회와 함께 박종필 감독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이야기했다. 이날 사전 행사의 사회자이자, 박종필 감독과 같은 영상 공동체 ‘다큐인’에서 활동하며 세상을 떠나기 순간까지 함께 했던 송윤혁 감독은 “박종필 감독이 준비했던 차기작 중에 박경석 대표를 중심으로 한 인물 다큐를 만들고 싶어 했다”는 말로 박종필 감독과 박경석 대표가 얼마나 돈독한 사이였는지를 설명했다.

“노회찬 의원이 생전에 한 말 중에 ‘투명인간’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분명 사람으로 살고 있는데, 아무도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주변부로 밀려나는 사람들을 뜻한 말이었어요. 얼마나 슬픈 말입니까. 우리 같은 장애인을 비롯한 ‘투명인간’에게 존재를 인식하게 만들어줬다는 점에서 박종필 감독은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어요.”

  여는 발언이 끝난 뒤에는 추모 영상이 이어졌다. 추모 영상에는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작품들과 인터뷰 발언, 그리고 사정상 추모 포럼에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그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인터뷰가 담겨 있었다. <뉴스타파>의 박정남 PD는 그가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라 소회했다. 그가 바라본 박종필은 활동가와 액티비스트 사이에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대표는 박종필 감독이 어떤 순간에나 카메라로 연대했던 사람이라 말했다. 마지막으로 장민경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활동가는 추모 포럼의 주제 의식과 연계되는 이야기로 박종필을 평했다. “역설적으로 박종필이 존재한 것보다 부재한 것이 너무 영향이 커요. 왜 그가 이 자리에 없는지에 문제를 제기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 추모 포럼 사전 행사의 마지막 순서로 416합창단의 공연이 진행되었다.


  사전 행사의 마지막 순서는 416합창단의 공연이었다. 416합창단은 세월호 유가족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일반인들이 뭉쳐 결성하여 합창을 통해 세월호 참사의 문제를 알리고 다양한 현장에 연대하는 노래패이다. 416합창단은 이 날 두 편의 노래를 골랐다. 하나는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노래 <잊지 않을게>, 그리고 정일근의 시에 이지상이 곡을 덧붙인 <사랑합니다>였다. 416합창단은 박종필 감독을 잊지 않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노래를 선정했다고 선곡의 변을 밝혔다.


“잊지 않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4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는 것도 점점 쉽지 않은데, 박종필 감독을 기억하는 건 얼마나 더 어렵겠어요. 기억한다는 건 본질적으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위입니다. 마치 연어가 고향에 가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오르는 것처럼, 남은 사람들은 박종필 감독이 남긴 가치를 따라갈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박종필 감독님은 힘없고 약한 사람들에게 계속 카메라를 비췄습니다. 저희 합창단도 그런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영상 활동가’로서 헌신한 박종필의 모습들

  사전 행사가 끝난 뒤 박종필추모사업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한진희 활동가의 사회로 추모 포럼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포럼은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그가 생전에 활동한 다양한 영역과 얽힌 지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활동했던 미디어 액티비즘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물음들이었다.

  노들장애인야학의 김도현 교사는 박종필 감독이 ‘영상활동가’라는 정체성으로 활동했던 것에 주안점을 맞춘 발제를 하였다. 대학생 시절부터 장애인 운동을 했던 김도현 교사는 장애인 운동에 얽힌 수많은 시위나 투쟁에서 카메라로 함께한 박종필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박종필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더 많은 장애인 운동의 이슈가 영상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고 활동가들 역시 영상을 통해 유기적인 액티비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장애인 문화운동 단체 ‘장애인문화공간’의 최재호 대표는 ‘장애인 미디어교육’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던 박종필 감독의 모습을 통해 미디어교육이 낳는 효과를 말했다.

“2001년 평택 에바다학교 투쟁 때 박종필 감독을 처음 만나고, 2002년에 다시 그를 만났습니다. 원래는 독립영화를 만들고 싶다며 찾아간 자리였는데,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미디어교육이라고 박종필 감독이 말하더라고요.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을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비장애인도 쉽게 구하기 어려운 캠코더가 있어야만 영상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박종필 감독이 적극적으로 움직여 미디액트와 함께 미디어 교육도 하고,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도 함께 열게 되었어요. 기술이나 품질은 투박하지만, 본인이 원하는 영상을 소중히 담아내고 장애인 운동에 관심을 가진 공동체를 만든다는 점에서도 소중한 순간들이었습니다. 항상 모든 순간에 박종필 감독이 있었어요.”




  빈민운동단체 ‘홈리스행동’의 이동현 상임활동가는 그의 영상 활동이 운동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을 중요하게 판단하는 발제를 했다. 그가 바라본 박종필은 카메라를 들지 않아도 계속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던 천상 ‘조직가’였다. “박종필 감독이 만든 작품이 홈리스행동이나 야학에서 상영된 적은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홈리스행동과 함께 한 계기로 언급되는 때가 많았죠. 하지만 그가 ‘영상’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카메라를 들어도, 계속 함께 운동을 하자는 주의였죠. 박종필에게 있어 다큐와 운동은 한 배를 타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미디어 액티비즘의 측면으로 바라본 박종필의 발자취

  앞서 김도현, 최재호, 이동현 활동가가 운동에 함께 연대하는 활동가의 측면에서 박종필을 기억하며 회고했다면, 포럼 후반부에는 박종필 감독의 행적을 미디어 액티비즘의 차원에서 바라보며 고민하는 이야기가 주로 언급되었다.

  서울독립영화제의 김동현 집행위원장은 독립영화의 배급 환경 변화와 연계하여 박종필의 미디어 액티비즘을 고민하는 이야기를 했다. 김동현 위원장은 박종필이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펼치던 시기는 독립영화를 다루는 영화제가 확대되던 시기와 겹치고, 이와 함께 많은 영상활동가와 상영활동가가 배출되었음을 주목한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시기 독립영화 정책의 개악과 블랙리스트, 그리고 전반적인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에서 박종필이 많은 어려움과 고민을 느꼈을 것이라 설명했다.

“박종필은 꾸준히 현장과 인물 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감독이었어요. 그가 주로 머물렀던 커뮤니티 외에도 또 다른 관객들과 만나며 자극을 받았으면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독립영화를 비롯한 액티비즘 영화는 다양한 플랫폼을 모색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던 시기였던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의 최은정 정책팀장은 ‘미디어운동 흐름 속에서의 박종필’을 주제로 그의 행적을 말했다. 박종필은 1996년 한겨레비디오제작학교에서 영상을 배운 뒤 미디어 액티비즘에 뛰어들었고, 동시에 2000년 이후부터는 한국의 퍼블릭액세스 운동과 긴밀한 연결고리를 형성했다. 한국 최초로 탄생한 시청자참여 프로그램이지만 동시에 많은 한계를 여전히 지니고 있는 KBS <열린채널>에서 박종필이 만든 에바다 투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이마리오 감독의 <주민등록증을 찢어라>와 함께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거센 논란이 이는 와중 속에서 박종필은 1인 시위 등의 방법으로 적극적인 문제 제기에 참여하며 퍼블릭액세스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 함께 싸워나갔다.

  그 이후에도 박종필은 퍼블릭액세스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시민방송 RTV에 편성된 프로그램 <나는 장애인이다>에서 박종필은 책임연출자로 활동하며, 장애인 문제를 미디어로 전달하려 시도했다. RTV가 정책 파행으로 위기를 겪으며 <나는 장애인이다>가 폐지된 전후에도 박종필은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장으로, 영화진흥위원회 파행 사태를 비롯한 독립영화 탄압에 맞서는 활동으로, 그리고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활동을 통해 꾸준히 퍼블릭 액세스를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보였다. 최은정 팀장은 발제를 마치며 박종필 감독이 생전에 보여온 자세와 미디어 활동가들에 대한 고민을 던지는 말을 남겼다.

“박종필 감독이 고민하는 액티비즘이 꼭 모범답안은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종필 감독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었어요. 다큐멘터리가 운동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고민하고, 그걸 직접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어요. 동시에 젊은 영상 활동가와도 인연을 많이 쌓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었고요. 박종필 감독이 떠난 뒤에도 남은 사람들이 그가 남긴 고민을 할 수 있는 만큼 실천할 수 있길 빕니다. 퍼블릭액세스를 위해, 영상을 배급하고 상영하기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너무 적어요. 일거리는 계속 많아 몸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요. 많은 이들이 누군가의 빈자리를 느끼고 아쉬워하는 일이 더는 생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영상공동체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의 활동가이자 <두 개의 문>, <공동정범>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김일란 감독은 현장의 인물과 관계를 맺고 연대를 한 박종필 감독의 태도에 방점을 기울이는 발제를 하였다. 김일란 감독은 처음에는 박종필 감독과이 사적인 인연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열었다.

“2012년 서울인권영화제 페막작으로 <두 개의 문>을 상영하고 난 뒤였어요. 청계광장에서 예상 이상으로 많은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해, 관객들의 반응에 민감해질 때였죠. 그러다 뒷풀이 장소에서 박종필 감독을 만났는데 <두 개의 문>에 대한 불편한 감상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때는 너무나도 기분이 언짢았죠. 그러다 몇 달 뒤 대학로에서 다시 감독님을 만났어요. <두 개의 문> 흥행을 축하해주며, 지난 번 뒷풀이 때 자신이 <두 개의 문>에 대해서 내뱉은 말에 대해 경쾌하고도 진심 어린 자세로 사과를 하셨습니다. 동시에 다큐멘터리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는 이야기도 덧붙이셨어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모습이었어요.”

  하지만 김일란 감독은 <두 개의 문>에 대한 박종필 감독의 불편함이 사실은 ‘혼란스러움’이었을거라 이야기했다. 다큐멘터리의 배급 구조가 극장 중심으로 변하는 와중에, 박종필 감독은 여전히 영화제나 공동체 중심으로 작업을 해왔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김일란 감독은 그 혼란스러움이 단순히 비판할 대상이 아니라, 박종필 감독이 작품을 만들며 현장과 관계 맺는 방식과도 연결되어 있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김일란 감독이 기억하는 박종필 감독의 모습은 카메라와 인물, 그리고 감독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는 자세를 가진 이였다. 그리고 아무리 환경이 열악하고 급박하며, 스트레스를 받을 지라도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발제문을 준비하면서 겨우 박종필 감독님의 작품들을 봤어요. 감독님이 만든 작품들 대다수는 카메라와 박종필 감독님이 자연스레 일치하는 순간이 많았죠. 마치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가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가장 큰 영감은 ‘현장은 행복한 공간’이라는 감독님의 자세였어요. 세월호 500일 추모집회가 있던 날, 미디어팀에서 행진을 촬영해 즉석으로 편집해서 상영하자는, 정말 무리한 계획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박종필 감독님은 다큐인 사무실에서 촬영한 영상들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편집하는 것은 물론, 완성된 영상을 자전거를 타고 10분 만에 광화문까지 도착해 사고 없이 상영할 수 있어요. 너무나도 벅찬 얼굴을 하고 있더라고요.”



또 다른 비극을 낳지 않기 위하여

  그러나 한편으로 김일란 감독은 그가 ‘활동가’로서 느낀 희열과 별개로 미디어 활동가가 놓인 현실은 개선될 필요성이 절실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포럼 발제에 이은 토론 발제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제기되었다.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 참여 중인 오지수 감독은 박종필 감독을 비롯한 미디어 활동가들이 놓인 상황을 성찰하는 방향으로 토론문을 발표했다. 오지수 감독이 바라본 미디어 활동가의 현 상황은 무척이나 고되며, 지속적인 활동 가능성이 보장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저를 비롯해 미디어 운동에 뛰어드는 많은 감독들이 ‘신진’ ‘여성’ ‘활동가’라는 이유로 잡무에 많이 매달릴 수 밖에 없어요. ‘여성 활동가’라는 말에는 싹싹하고, 일 빠르게 처리하고, 말귀를 잘 알아들어야 한다는 이미지가 부여되고, ‘신진’이라는 말에는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겨요. 게다가 아무리 다큐를 만들어도 사람들의 삶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 좌절감이 많이 들기도 하고요. 또한 지금은 알바를 하며 생업을 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다시 현장을 촬영하는 구조에요. 기초적인 생계도 보장되지 않는데, 다른 일을 하며 재정을 메꾸다 보니 자연스레 아파도 아프다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동료들은 사라지고 맙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활동을 하고 싶어요. 어찌 보면 박종필 감독님은 미디어 활동가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을 과제로 남겨주고 떠나신 것 같습니다.”

  오지수 감독의 발제를 끝으로, 모든 포럼은 끝이 났다. 원래는 발제자, 토론자는 물론 현장에 참석한 다양한 이들과 함께하는 토론이 있어야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행사 시간이 길어진 끝에 아쉽게도 자유 토론은 진행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란 감독과 오지수 감독이 제기한 ‘미디어 활동가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의 지적은 너무나도 유효했다. 박종필 감독은 49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토론자로 참여한 김일란 감독 역시 비슷한 시기에 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했다. 그 밖에도 많은 미디어 활동가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건강상의 문제로 인해 지속적인 활동의 어려움을 겪는다. 김동현 위원장과 최은정 팀장의 발제처럼,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역시 미디어 활동가들에게는 갈수록 따라가거나 대응하기 벅찬 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미디어 활동가의 지속적인 활동과 새로운 모습의 퍼블릭액세스를 위해 필요한 정책은 무엇이고, 세워야 할 구조는 어떤 모습일까. 안타깝게도 플로어 토론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어찌보면 오랜 시간 계속 논쟁과 토의가 필요한 주제였다. 또한 이번 포럼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다양한 자리에서, 저마다의 삶의 영역에서 고민과 실천이 필요한 문제일 수밖엔 없다. 평생 차별에 저항하며 살아간 박종필 감독이 보인 삶의 자세처럼, 이제 남은 사람들은 또 다른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계속 성찰해야 할 것이다. □



▲ 추모 포럼이 끝나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박종필 감독 1주기 추모제가 개최되었다. 많은 이들이 박종필 감독을 기억하고, 그의 뜻을 이어나가겠다는 발언으로 추모제를 가득채웠다. 미디어운동은, 그리고 퍼블릭액세스는 어떻게 그가 남긴 숙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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