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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07호 리뷰] <춘천, 춘천> - 현재가 그대를 힘들게 할지라도, 우리의 삶은 도무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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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7. 11. 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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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07호 리뷰 2017.11.22.]

 

현재가 그대를 힘들게 할지라도, 우리의 삶은 도무지 알 수 없다.
- <춘천, 춘천> (장우진, 2016)

 

권진경(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원)


  “<춘천, 춘천>은 전형적인 드라마적 구성을 탈피해, 춘천이라는 공간과 주인공들이 점유한 시간을 조용히 관조하는 스타일이 돋보이는 작품”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이곳(춘천)이 모종의 계기적 장소로 여겨진 것은 과거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곳을 배회하던 인물들의 몸짓과 말이, 비록 일시적이긴 하지만, 유일무이한 현재 속에서 빛나는 순간들이 있다. 장소란 기억과 결부된 것도 아니고 풍경과 결부된 것은 더더욱 아니며 절대적으로 현재에 충실한 움직임을 통해서만 부단히 생성되는 흐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순간들이 말이다.” (유운성 평론가, ‘장소 없는 영화의 시대를 위한 에토스 - <혼자>, <춘천, 춘천>, Littor 5호)

  <춘천, 춘천>은 막연한 비관주의와 냉소적 결론에 머물지 않고 매혹적인 영화의 순간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인다. 천막으로 스며드는 빛과 그림자의 유동과 얼굴에 드리워진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가능케 하면서 두 사람의 투 숏을 투과하는 유리창의 이미지는 영화라는 장치가 본편의 인물들을 포괄하며 그곳에 버티고 서있다는 신실한 믿음을 형상화한다. 여기엔 영화가 구축될 수 없다는 상태에 저항하는 활발한 영화적 기운이 생동하고 있다. 이런 독립영화를 기다려왔다. (김병규, 팝업시네마 리뷰 <춘천, 춘천>, 빛과 그림자와 물의 협주곡 중)

  장우진 감독의 <춘천, 춘천>(2016)에 대한 평자들의 이야기이다. 어떤 평자들은 <춘천,춘천>을 두고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1998) 혹은 <생활의 발견>(2002), 지아 장커 감독의 <스틸라이프>(2006)을 언급하기도 한다. 아마도 <춘천, 춘천>을 두고 <생활의 발견>이 떠올랐다면 그건 아마도 춘천이라는 로케이션 장소가 같아서 그럴 것이다.

 

▲ 영화 <춘천, 춘천> (장우진, 2016)

 

 

  개인적으로 <춘천, 춘천>은 <생활의 발견>보다 <강원도의 힘>이 더 많이 생각나게 하는 영화 였다. <강원도의 힘>이 그랬듯이 1,2부로 나뉜 <춘천, 춘천>은 2가지 이야기가 병렬식으로 나란히 펼쳐진다. 그런데 <강원도의 힘>은 1,2부에 각각 등장 하는 주인공들이 헤어진 불륜 커플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춘천에 살고 있는 취업준비생(1부)과 춘천에 밀회를 즐기려온 수상한 커플 사이에 비슷한 점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두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굳이 찾겠다면, <춘천, 춘천> 오프닝에서 춘천 가는 경춘선 전철 좌석에 나란히 앉은 주인공들? 춘천역, 춘천마라톤 대회, 소양호, 청평사 등과 같은 공간을 맴도는 정도? 분명히 말하지만, <춘천, 춘천>은 <강원도의 힘>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너무나도 다른 영화이다.

 

  <춘천, 춘천>이 홍상수 영화와 비슷하다고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홍상수, 장우진 감독 모두 현장성을 중시하는 영화 제작 방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촬영 당일 시나리오를 쓰는 것으로 유명한 홍상수는 그래도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서 철저히 계산된 대본에 따라 촬영을 진행한다. 그런데 <춘천, 춘천>은 아예 시나리오가 없다. 콘티도 없다. 대략적으로 이 장면에서는 이렇게 찍을 것이다 정도만 기재된 트리트먼트만 존재했다. 홍상수도 하지 않은 모험은 <춘천, 춘천>은 감행한 것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스크리너로 <춘천, 춘천>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솔직히 끝까지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다음날 다시 스크리너로의 감상을 시도해봤는데 역시나 1부의 취업준비생 이야기 그 이상을 넘지 못했다. 1부까지 본 당시 소감은 이랬다. 예나 지금이나 홍상수 영화의 광팬을 자처하는 필자는 홍상수의 아류작으로 보여지는 <춘천, 춘천>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후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발간하는 비평전문지 독립영화에 ‘2016년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극영화에 관한 조금 긴 후기’라는 제목으로 <춘천, 춘천>을 언급한 정한석 평론가의 글("신인감독의 필사적인 형식적 자의식이, 그러니까 그 자의식이 아직 설익고 부족하다고 해도, 그것이 독립영화에 있어 얼마나 더 필요하고 긴급한 것인지를 일깨우는 중요한 예가 되고 있다.")도 보았지만, <춘천, 춘천>이 홍상수 아류작이라는 의심을 쉽게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춘천, 춘천>을 지지하는 믿을만한 지인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지인을 통해 <춘천, 춘천> 스크리너를 몰래 구해 영화에 대한 재도전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영화를 끝까지 보기로 하면서. <춘천, 춘천>은 역시 끝까지 봐야 그 진가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영화이다. 앞서 말했지만 두 개로 나눠진 이야기의 연관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춘천을 떠나고 싶지만 춘천을 도통 벗어날 수 없는 청년과 여행이라는 일시적인 체류 탓에 춘천을 떠날 수밖에 없는 밀회 커플의 이야기가 합쳐지면서 <춘천, 춘천>은 홍상수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반복과 차이’라는 묘한 운동성을 구현한다. 이것이 필자가 <춘천, 춘천>을 재평가하게 된 주요한 계기였다.

 

  이후 극장에서 큰 스크린을 통해 <춘천, 춘천>을 몇 번 더 볼 기회가 생기면서, 필자는 ‘반복과 차이’ 외에 <춘천, 춘천>에 끌리는 다른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홍상수 영화 속 인물들이 늘 그렇듯이, <춘천, 춘천>의 주인공들도 어느 하나 자기 뜻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 1부에서 친구 소개를 통해 서울에서 면접을 보고 춘천 집으로 돌아온 지현(우지현 분)은 이내 면접 결과를 보고 낙심한다. 이후 유람선을 타고 청평사에 갔다가 근처에서 친구 어머니가 하는 식당일을 도와주게 된 지현은 춘천 시내로 나가는 유람선 막차를 놓치고 친구 어머니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2부에서 인터넷 채팅으로 알게 된 세랑(이세랑 분)과의 첫 여행을 통해 그녀와 긴밀한 관계로 이어나가고 싶은 흥주(양흥주 분)의 바람과 다르게 그들의 인연은 춘천에서 일단 막을 내린다.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다’라는 식의 약간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 사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감독 자신도 모른다.

 

  춘천에서 원하는 바를 이루어내지 못한 이들의 삶은 멜랑꼴리 그 자체이다. <춘천, 춘천>은 굉장히 우울하고 염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영화이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나름 노력 하고는 있지만, 변한 것은 거의 없다.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춘천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호수에 고여 있는 물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주위만 뱅뱅 맴돈다. 언제나 남녀 간의 파국으로 끝나버렸던 홍상수 영화는 다른 질감의 멜랑꼴리다. 그런데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해 더 찌질한 웃음을 자아내는 홍상수의 남자들과 달리 <춘천, 춘천>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현실을 자연스럽게 인정한다. 세상에 대한 완전한 체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춘천, 춘천>은 지극히 염세적이지만 비관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될지는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도, 감독도 모른다. 다만,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현실이 그리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 뿐이다.

 

 


▲ 영화 <춘천, 춘천> (장우진, 2016) 포스터

 

  <춘천, 춘천>이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는 현재성이다. 생방송 형태로 실시간으로 담아내지 않는 이상, 카메라에 담긴 영상들은 모두 과거, 지난날의 것이 되어버린다. <춘천, 춘천>의 푸티지들은 모두 2015년 가을에 촬영된 것들이며,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과거다. 지금의 우리는 몇 년 전 배우들이 연기한 영상들을 보고 있을 따름이다. 과거에 찍은 영상을 보고 어떻게 현재성을 느낄 수 있을까. <춘천, 춘천>은 인물들의 과거, 미래를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오직, 카메라에 비춰지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꿈틀거리는 인물들의 행동과 시선 표정이다. (카메라) 눈에 비치는 것만 보여주는 <춘천, 춘천>은 굉장히 솔직한 영화다. <춘천, 춘천>의 감독은 절대자의 입장에서 영화의 세계관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감독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인물(배우)들이 행동하는 대로 따라가고 조용히 그들의 행위를 관조한다. 영화 속 인물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심하게 바라보는 <춘천, 춘천>을 지배하는 논리는 ‘모름’ 그 자체이다.

 

  일단 카메라가 돌아가면 감독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현장성을 중시한 촬영 덕분에 여백이 많은 <춘천, 춘천>은 덕분에 필자와 같은 관객들이 영화에 마구 끼어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안겨 준다. 설령, 감독의 의도한대로 영화를 해석할 필요도 없다. 지금의 내가 <춘천, 춘천>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춘천, 춘천>은 과거 내가 알던 영화와 다른 영화가 될 수 있다. 몇 달 전만 해도 <춘천, 춘천>은 필자에게 홍상수 아류작 그 이상도 아니었다. <춘천, 춘천>을 극장에서 2번 본 이후 영화에 대해서 느낀 감흥은 그 때 마다 달랐다. 앞으로 <춘천, 춘천>을 다시 본다면 이전과 비슷한 감상을 할 수도 있겠고,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고 의미 부여를 할 수도 있겠다.

 

  <춘천, 춘천>을 여러 번 봤지만 아직도 필자는 <춘천, 춘천>이 어떤 영화인지 잘 모르겠다. 앞으로 몇 번 더 <춘천, 춘천>을 보고, 이 영화에 관한 글을 몇 번 더 쓴다고 한들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정의하는 것은 필자에게 있어 상당히 어려운 과제로 남을 것 같다. 굳이 <춘천, 춘천>이 어떤 영화인지 명확히 알고 싶지 않다. 다만, 지금의 내가 <춘천, 춘천>이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보았고 이 영화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이 중요할 뿐. 우리의 삶은 확실하지 않기에 그만큼 많은 가능성과 여지를 남긴다. □

 


 

글쓴이 권진경

2009년부터 대중문화, 영화에 대한 글쓰기를 시작했고 2016년부터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의 일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마이스타’, ‘미디어스’를 중심으로 영화에 관련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다큐 제작도 준비 중인데 생각만큼 쉽게 풀리지 않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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