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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44호 인터뷰] 화려한 정보화(情報化) 속의 빈곤한 정보화 (1) : 정보화의 숨은 원천(源泉), 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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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8. 12.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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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44호 / 2007년 8월 10일

 

 

화려한 정보화(情報化) 속의 빈곤한 정보화 (1)

: 정보화의 숨은 원천(源泉), 책 이야기


윤상길 (꿈꾸는 미디어史家, cyrus92@dreamwiz.com)
 

현 시대 대한민국에서 삶을 살고 있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정보화는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너무 거창하게 들리신다면, 소박하게 바꾸어 질문해 보자. 정보화란 무엇인가? ‘정보’(情報)라는 단어에 ‘된다’를 뜻하는 ‘화’(化)를 붙여 만든 조합어인 ‘정보화’는 일반적인 뜻풀이의 관습대로라면 ‘정보가 된다’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정보가 된다? 정보가 되긴 뭐가 된다는 것인가? 도시형성 - ‘도시가 된다’ - 을 의미하는 ‘도시화’라는 단어가 ‘도시’와 ‘화’의 조합어임을 감안하다면, 정보화라는 말은 일반적인 어법상으로 그 뜻을 알 수 없는 말처럼 보인다. 그래서 왠지 뭔가 중간에 생략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어느 TV프로그램에서처럼 ‘정보가 

된다’는 식의 문답으로 바꾸고 이 빈 네모칸을 ‘돈이’ 혹은 ‘상품이’로 채워 넣는다면, “현대사회에서 정보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다”는 식으로 정보화의 의미를 대략적으로 받아들 수 있을 것 같다. 
또는 ‘인터넷 강국’이라는 정부의 홍보를 일상생활에서 많이 접하게 된 독자들이라면, 정보화의 의미를 경험적으로 해석하여 ‘초고속통신망이나 전화의 높은 보급률’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 얘기한 것 중 어느 쪽을 정보화의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사실 일상생활에서는 큰 무리도 없을 뿐더러 큰 불편함도 없을 듯싶다. 그렇지만, 당장의 편리함이 앞으로 다가올 불편함을 예비하듯이, 정보화에 대한 이러한 자기편리적 이해는 앞으로의 재앙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어느 한 인문학자의 한탄에 가까운 자기 독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 현대인에게 ‘책’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여전히 ‘책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실상은 ‘책의 무관심’ 시대에 익숙해버린 것은 아닐까?......인쇄매체를 통한 지적 네트워크가 더 이상 생산적 문화 창출의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우려와 함께, 또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아날로그식 창작 및 독서, 유통시대는 철퇴를 맞고 있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책은 우리에게, 아니 필자 개인에게 언제부터인가 ‘비밀의 화원’이 되어 버렸다. 어느새 우리들은 종이책을 ‘비밀의 화원에 감춰 두었다가 때때로 완상(玩賞)을 위한 호사품 정도로만 여기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정작 책을 비밀의 화원에다 묻어두고 살아가려는 우리들에게 비애(悲哀)가 있다면,.........현대인들은 정말로 책이 지금까지 인류에게 선사한 감동과 희열, 그리고 분노와 슬픔의 변주곡이 얼마나 우렁차고 감미로웠는지를 맛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주1)
위의 독백이 혹자에겐 과거지향적 혹은 노스텔지어적 감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초고속통신망의 높은 보급율을 정보화의 징표로서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충분한 하나의 경구로서 의미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따라서 이번 연재글에서는 정보화의 진정한 의미와 그 의미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책(서적)의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대한민국 ‘정보화’의 초상.

그렇다면 정보화를 초고속통신망의 높은 보급률과 동일시하는 인식은 그릇된 것일까? 만약 그릇된 것이라면, 정보화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물론 (앞서 얘기한 것처럼) 정보화를 초고속통신망의 높은 보급률로 이해하는 것이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라고 단언하긴 힘들다. 왜냐하면 정보화를 정보기술의 가속화 ? 고속화 ? 고충실화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보화 현상의 한 측면을 의미 있게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정보화의 의미를 한 측면에만 국한하여 너무 좁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우선 정보화를 규정하는 핵심요인으로서 컴퓨터와 통신기술의 발전과 융합에 의한 정보처리 및 커뮤니케이션상의 변혁을 들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 소위 ‘정보화 지표’이다. “정보화 지표는 정보화의 진전에 따른 사회지표의 일환으로서, 정보와 관련한 국가 전체 또는 어느 한 부분의 정보화 수준의 현실과 미래의 진전정도 및 변화속도를 올바르게 측정하여 체계적으로 가능한 총체적이고 함축적인 지수로 나타낸 것”(*주2)인데, 한국에서는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과 한국과학기술원(KIST), 한국전산원 등이 1989년 이후 추산해 오고 있다. 각 기관마다 약간의 차이점은 있으나, 이들 기관들은 정보화를 정보처리 및 전기통신에 관련된 제반변화가 사회전체로 확산되어 가는 현상으로 보고 있고, 또 그에 따라 정보화 지표를 ‘정보처리 및 통신을 위한 정보하부구조로서의 정보설비 및 기기가 얼마나 사회에 보급, 확산, 사용되고 있는가’에 치중하여 측정하고 있는 점에서 그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주3) 말하자면 정보가속화 및 정보고속화에 있어서 테크놀로지가 미치는 영향을 절대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이러한 테크놀로지가 한 사회에 도입되기만 한다면 그 테크놀로지 속에 내재된 바람직한 속성이 자동적으로 그 사회에 실현된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반영하듯, 어느 한 신문기사에서는 정보설비의 보급을 기준으로 산정한 정보화 지표의 국가 간 비교를 통해, 2005년 한국의 정보화 수준이 세계 3위에 도약하게 되었다며 매우 흐뭇해하고 있다.(*주4) 물론 한국의 정보화 수준이 세계 3위에 해당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선 필자 개인으로서도 별다른 이의제기를 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화에 대한 협소한 인식에서 왠지 모르게 소위 하드웨어/뉴미디어 지향적인 ‘공무원 마인드’가 느껴진다면, 이것은 필자의 지나친 생각일까? 정보화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지만, 정작 정보 그 자체는 괄호 쳐 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것 또한 필자만의 독특한 감성에서 비롯된 것일까?
일견 정보화 현상을 컴퓨터나 전기통신기술과 같은 전자계 미디어 기술에 치중하여 파악하던 것에서 벗어나, 우편 ? 신문 ? 서적 등의 비전자계 미디어 기술이나 라디오 ? TV와 같은 방송미디어 기술에까지 그 범위를 확장하여, 좀 더 넓은 의미로 정보화를 파악하는 것이 정보화에 대한 제한된 인식을 치유하는 한 방책으로 타당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여전히 기술중심주의적이고 기술결정론적인 시각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시각교정은 이뤄질 수 없을 듯하다. 의외로 시각교정의 단초는 단순하게 ‘정보’ 개념을 다시 생각해 봄으로써 얻어진다.

2. 편향된 ‘정보’(情報) 개념
그 지칭하는 바가 서로 인접해 있기 때문에 별 의식 없이 사용하고 있는 개념들인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정보’는 사실상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있다. 이를테면, 지칭하는 범위가 가장 큰 개념인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개념 규정이 이뤄지면, 마치 부모의 유전자가 자연스럽게 자식에게 전해지듯, 그 커뮤니케이션 개념을 구성하고 있는 하위개념들인 미디어 개념과 정보개념은 자연스럽게 이미 이뤄졌던 그 특정한 방식을 따르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정보화를 ‘정보통신설비의 확산’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은 우연의 산물이라기보다 왠지 그 역사적 기원이 더 오래된 구조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양하지만) 문화연구자인 제임스 캐리(James Carey)의 의견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 개념에 대한 인간의 사고방식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갈래로 나뉠 수 있다.(*주5) 첫 번째는 커뮤니케이션을 특정한 정보를 전파하는 작용이나 기술로 간주하는 ‘전파적 관점’(transmission view)이고, 두 번째는 (이미 지난 연재글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커뮤니케이션을 참여자들 간 공통의 기반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파악하고자 한 ‘의례적 관점’(ritual view, 儀禮的 觀點)이다(*주6). 아래 [그림1]의 개념 구분도상의 가장 외곽선 안쪽 모두에 해당되는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전파적 관점은 정보를 전달하는 현상에 치중하여 파악하는 방식이라면, 의례적 관점은 (마치 사람들이 종교행사에 참여함으로써 목사가 설교하는 세계관을 공유하게 되는 것처럼) 일종의 의례인 미디어의 매개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 혹은 지역과 지역 사이에 공통의 기반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방식이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의 개념 규정은 각각의 미디어 개념과 정보 개념을 동반한다. 우선 커뮤니케이션을 전파적 관점으로 파악하는 경우, 미디어는 정보가 담기는 단순한 회로나 용기(容器)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렇다고 미디어가 아주 사소한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미디어가 정보를 담아내는 용량과 효율성이 고속화 ? 가속화되는 순간 혹은 정보전달통로로서의 미디어 기능이 정지되는 순간, 미디어의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증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중요성이 상수(常數)로 지속되는 정보에 비해, 미디어는 이 두 순간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변수(變數)에 불과하다.

한편, 커뮤니케이션의 전파적 관점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정보 개념은 객관주의적 정보론에 입각한 것이다. 영영사전에서 영어단어 ‘information’을 찾아보면 그 뜻이 ‘facts’라고 되어 있는데(*주7), 이러한 사전 상의 의미는 객관주의적 정보론의 요체를 잘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어로 번역해 볼 때 ‘정보는 사실이다’라는 허무한(?) 뜻풀이에 불과한 것이 어찌 객관주의적 정보론을 잘 말해준다는 것인가? 객관주의적 정보론에 의하면, 정보는 실제의 사물 속에 내재해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실재한다. “예컨대, 불이 나면 연기가 난다는 것은 자연법칙이고, 따라서 숲 속에서 나는 연기는 ‘숲 속에 불이 나고 있다’는 정보를 담고 있다”.(*주8) 즉, 연기 속에 ‘불이 나고 있다’는 정보가 담길 수 있는 것은 자연의 법칙성 또는 규칙성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정보는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노란 책상에 대해서 ‘이 책상은 검은 색이다’고 말했다면, 그 말은 책상의 상태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없기 때문에, 객관주의적 정보론에서는 정보를 ‘참인 정보’로 제한한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의 전파적 관점에서는, 미디어에 담기는 정보가 ‘항상 참일 것’이라는 전제에 기반하거나 혹은 ‘항상 참이어야 할 것’이라는 당위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있다. 
이즈음에서 현명한 독자라면, 정보화의 지표로서 ‘정보통신설비의 보급’과 ‘정보량’이 주요 측정항목으로 설정된 근본 이유가 실상은 특정한 방향으로 ‘커뮤니케이션-미디어-정보’의 3종 개념세트를 이해하려고 한 인간의 편향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눈치 챘을 것이다. 미디어에 담기는 정보는 거의 항상 참이기 때문에, 미디어 기계의 고속화는 참된 정보의 빠른 전달을 가져오고, 때문에 미디어 기계를 통해 전송되는 정보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보화의 실현 정도는 크다는 기술결정론적인 기본 논리 또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인간주체가 회복된 ‘정보’ 개념으로의 복귀

그러면 우리는 앞서 살펴본 바의 편향된 정보 개념을 어떻게 극복해야만 진정한 정보화에 대한 이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정보가속화에 있어서 기계가 중요한 요인이긴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요인은 아니며, 소위 ‘이성의 시대’ 즉 ‘물리적 혁명’(하드웨어)에 선행하는 ‘정보시스템에 있어서의 문화혁명’(소프트웨어)이 보다 더 중요하다”(*주9)고 본 다니엘 헤드릭(Daniel Headrick)의 지적을 논의의 주요한 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그가 언급한 ‘정보시스템 상의 문화혁명’이란 곧 사람들이 미디어 기계를 통해 얻게 되거나 그 기계에 담겨지게 되는 정보를 조직화하고 다루는 데 있어서 의존하는 테크닉(技能)과 기법 상의 변화를 의미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정보를 수집하거나, 명명 ? 분류 ? 조직하거나, 변형 ? 도시(圖示)하거나, 저장 ? 검색하거나, 혹은 정보를 소통시키는 데 있어서 사용되는 기법 상의 변화가 정보가속화, 즉 정보화를 추동하였다는 얘기이다.(*주10) 결국 그의 이러한 지적은 정보에 대한 사고를 함에 있어서, 그 초점을 미디어 기계로부터 인간 주체로 옮기게 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러면 정보를 사고함에 있어서 어떻게 인간주체를 통합시켜 사고할 것인가? 이에 대해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주관주의적 정보론이다. 주관주의적 정보론에 의하면, (앞서 객관주의적 정보론에서 언급한 바 있는) ‘숲 속에서 나는 연기’는 그저 그 자신을 인간에게 내보이고 있을 뿐이다. 대신 그것을 정보로 전환시켜 주는 것은 그 ‘내보임’을 해석하는 주체인 인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주11) 마치 평소 길을 지나 다니면서도 길가에 피어 있는 꽃 - 그저 그 자신을 인간에게 내보이고 있을 뿐인 꽃 - 을 거의 인식하지 못했지만, 연인과 사랑에 빠진 순간부터 그 꽃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어느 한 인간처럼 말이다. 이 논지에 의거한다면,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을 정보로 만들어주는 것은 항상 인간의 주관적인 가치판단과 결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서게 되면, 심지어 정보의 가치 또한 정보 자체에 내포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보자원을 상품으로 변형시키는 조건, 즉 정보가 속한 사회제도와 사회적 관계에 의하여 상품이 되는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지식정보사회’라는 말에서처럼 흔히 병렬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지식’ 개념 또한 실상 ‘정보’ 개념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주12) 결국, 정보 개념을 사고함에 있어 주관주의적 정보론이 궁극적으로 함의하는 바는, (정보를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따라서 때론 인간을 속박하기도 하는 실체로 파악하기보다) 정보를 해석하고 조직화시키는 인간주체의 사회적 실천을 필수적으로 고려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이렇듯 인간주체의 사고과정을 중심해 놓고 정보 개념을 생각하게 된다면, 앞서 언급하였던 ‘정보화’의 의미는 새롭게 다가온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지만, 정보화의 진정한 의미는 정보를 처리하고 가공하는 기계의 성능강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조직화하고 다루는 인간능력의 강화,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정보[미디어]시스템의 균형적 발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필자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면, 이제 남은 마지막 의문은 인류역사상 가장 심대한 변화를 겪은 정보화의 분기점은 과연 언제부터인가 하는 질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다니엘 헤드릭의 얘기에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대체적으로 1700년부터 1850년 사이에 유럽사회는 경제성장과 인구성장으로 인하여 새로운 정보시스템의 등장을 목도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새로운 정보시스템에의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어서, 인쇄테크놀로지의 도입으로 인해 정보매체이자 그 자체로 정보덩어리라 할 서적과 서적문화가 크나큰 역할을 하였다는 데 있다. 따라서 다음 장부터는 인류사회 정보화의 숨은 원천인 책(서적)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도록 할 것이다. □
(다음 달에는 동일주제의 두 번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 주

1. 이민희 (2007), 《16-19세기 서적중개상과 소설?서적 유통관계 연구》, 서울 : 도서출판 역락, pp.1-2
2. 한상완 (1997), 《정보사회의 전개와 정보이용》, 서울 : 구미무역주식회사 출판부, pp.117-118 
3. 이에 따라 정보화 지표를 구성하는 하위 지표로서, 정보통신 인프라의 보급정도를 나타내주는 ‘정보설비 지표’, 정보통신 설비 및 서비스의 활용정도를 나타내주는 ‘정보이용 지표’, 그리고 정보통신 관련 투자와 그 결과를 나타내주는 ‘정보화지원 지표’를 구성하여 측정해 오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한상완의 글(1997)을 참고하기 바람.
4. 한국전산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정보화 수준의 세계 3위 평가는 세계 최상위권 수준인 인터넷 이용자 수, 초고속인터넷가입자 수와 케이블 TV 가입자의 꾸준한 증가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은 PC보급대수(9위), 전화회선 수(15위), 이동전화 가입자 수(24위), TV보급대수(25위)에서는 중상위권 정도의 평가를 받았으나, 인터넷이용자 수(3위), 초고속인터넷 가입자 수(1위)는 세계 최상위권 수준이라는 것이다(해럴드 경제, 2005.8.23) 
5. Carey, James W. (1989), "A Cultural Approach to Communication", Communication As Culture : Essays on Media and Society, New York: Routledge6. 그에 의하면, 지배적인 관점으로서의 “전파적 관점을 이루는 주요용어에는 전달(imparting), 발송(sending), 전파(transmitting), 혹은 ‘정보전달’이 포함된다. 특히 ‘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원거리 메시지전송이 중심개념이다. 우리는 그 기원을 종교(혹은 종교적 태도)로부터 찾을 수 있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운송(transportation)은 근원적으로 종교적 함의를 가진 커뮤니케이션 형태로 여겨졌고, 공간상의 이동은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시도 그 자체였다(제국주의적 세력 확장이 가장 먼저 ‘선교’로부터 이뤄진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라). 새로운 기술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더 빨리 더 멀리 보낼 수 있게 해주는 축복받은 존재였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사회의 세속화가 진행됨으로써 과학과 세속성이 종교적 함의를 압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커뮤니케이션은 인간과 공간을 지배하고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과 기술로 간주되어 왔다”. 반면 전파적 관점에 비해 비주류이지만 훨씬 더 오래된 관점인 “의례적 관점에서, 핵심어는 ‘나눔’(sharing), ‘참여’(participation), ‘연합’(association), ‘동료의식’(fellowship)과 ‘공통된 신념’이라 할 수 있다. 의례적 관점에서의 전형적인 커뮤니케이션 형태는 동료의식과 공통성 속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성스러운 의례이다. 이 관점은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독창적인 발현이 전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행동에 대한 통제이자 담지자로서 기능할 수 있는 질서 잡힌 문화적 세계를 구성하는데 있다고 본다”(Carey, ibid, pp.). 
7. 네이버 영영사전
8. 구연상 (2004), 《매체정보란 무엇인가》, 서울 : 살림, pp.34
9. Headrick, Daniel R. (2000), When Information Came of Ag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p.8
10. Headrick, ibid, pp.4-5
11. 구연상, ibid, pp.40-42
12. 文化史家인 피터 버크에 의하면, “‘정보’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날 것’인, 특수하고 실용적인 것들을, ‘지식’이라는 말은 ‘익힌 것’, 사고과정을 거쳐 분석 또는 체계화된 것을 가리키는 데 각각 사용된다. 우리의 두뇌는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을 분석 ? 처리하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Burke, Peter (2000), Social History of Knowledge: From Gutenberg to Diderot, 박광식 역(2006), 《지식 : 그 탄생과 유통에 관한 모든 지식》, 서울 : 현실문화연구, p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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