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ACT! 45호 미디어꼼꼼보기] [공공 씨의 하루] -노동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노동영화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본문

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45호 / 2007년 9월 12일

 

 

[공공 씨의 하루] 


-노동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노동영화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시와
 


'노동자가 주인공이면서 노동자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라는 홍보 문구의 등장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멀티플렉스를 너끈히 잠식해버린, 속절없는 광고 카피와 총천연색 포스터를 새삼 상기해보면 낯선 이질감은 더하다. 여전히 노동자보다 근로자라는 단어가 친숙하게 뉴스에 오르내리며 파업권이 실제로 불법의 영역으로 취급되는 것과 동시에, 갖가지 취향을 개발시켜 소비가 전제된 다양한 재미를 취하라고 속삭이는 세상에서, 노동 영화는 그저 고루하고 우울한 정서가 지배적인, 피하고 싶은 재현으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더욱이 노동과 노동운동에 관하여 주입되어 고정된 단조로운 이미지와 사회의 밑을 논하는 영화는 직설화법을 통해서만 발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제한된 상상력이 통하는 현실에서, 노동의 이야기임을 전면적으로 내세워 부각시킨 용기는 어떠한 토대 위에서 가능한지 궁금했다.
<공공 씨의 하루>는 한 금속공장에서 근무하는 공공 씨의 출근길부터 퇴근길에 이르는 다사다난했던 시간을 공공 씨의 시점에서 전개하며, 영세한 생산현장에서 일하는 중년의 기혼남성 노동자가 처해있는 현실의 무게감을 전하고자 한다. 영화는 맞벌이를 해야만 생계가 유지되기 때문에, 어둑어둑한 새벽녘 퇴근길과 출근길로 갈린 지점에서 마주한 부부의 행보를 보여주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어 출근길 차창 밖, 낯익은 서울의 풍경을 머금은 공공 씨의 어두운 눈빛과 한바탕 장대비를 예비한 맑고 드높은 하늘을 강조하면서, 열악한 노동현장이 야기한 어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주인공의 현실과 이후 영화에서 등장할 불길한 사건의 전조를 시사코자 노력한다. 뒤이어 영화는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발생할 법한 갖가지 문제들과 생산직 (남성) 노동자들의 정서를 노출시켜 이를 인지시키는 데에 주력한다.
그러나 노동현장에서 문제라 지목되는 현안들을 공공 씨의 하루에 압축적으로 전개하여, 이를 대면하는 노동자들의 고뇌를 전달하고자 하는 영화의 의도는 지나치게 손쉽게 처리된다.
즉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이를 관객과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관한 고심의 흔적을 찾기 어렵고,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주조 틀에 채워 넣는 데에 급급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영화의 각 에피소드들은 몇 마디의 문구로 손쉽게 요약이 가능할 정도로 친숙하면서 사실 진부하다. 가령, 역동적인 기계의 움직임과 더불어 분주히 돌아가는 생산 현장, 관리자의 눈치를 보며 끊임없이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공장 생활의 한 토막, 고된 노동의 시간을 잠시 잊고 동지들과 어우러짐으로 인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족구 한판, 땀과 뒤범벅된 맛깔스러운 점심, 막걸리 한 사발과 더불어 갑갑한 현실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는 점심시간 등...
의미를 메우기 위해 여념이 없는 에피소드들의 퍼레이드는 숨이 가쁜 동시에 공허하다. 영화의 목적을 전달하기 위해 튼실하게 직조된 씬의 구성이 아니라 노동 현장에서 회자되는 바를 맥락과 무관하게 나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각 에피소드 역시, 의도가 바로 드러나는 익숙한 상황설정 아래 의미로 충만한 작위적인 대사와 클로즈업, 단선적인 감정 흐름을 조장하려는 음악의 뜬금없는 등장으로 메워진다. 예를 들어 매일 얼굴을 맞댄 노동자들이 점심 식사 중 "철야 좀 작작해라.", "식구들 먹게는 살게 해줘야 하지 않겠냐?", "할일 있는 게 어디냐, 언제 잘릴지 모르는데" 등의 대사를 주고받는다. 이는, 철야 근무를 통하여 잔업수당까지 받아야 입에 풀칠할 수 있는, 가장으로서 멍에를 진 고용불안에 처한 중년의 기혼 남성 노동자의 현실을 드러내고자 쓰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매일 얼굴을 맞대며 동고동락한 동지들이 점심 식사 중 개탄하는 현실의 중량은 무겁다. 일대일적으로 해석 가능한 대사들의 연속이 버거운 이유는, 각 대사에 담지 된 무거운 현실의 중량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영화를 보면서 줄곧 마주하게 되는 이러한 화법이 노동의 현안을 공감하고 노동자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에 기여하기보다는, 영화 전체적인 호흡과 동떨어져 의도만이 도드라진 결과로, 생뚱맞다는 거리감을 유발시키는 데에 기능한다는 점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족구를 벌이는 아주 긴 장면에서, 유쾌함을 전이시키기 위해 사용한 발랄한 음악이나 특수효과가 영화에 버무려지지 못한다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에서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은 공공 씨의 동료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당하는 장면이다. 예사롭지 않던 날씨와 못내 침침했던 눈이 수상했는데 결국 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된다. 이 사건은 출구가 없는 음지 앞에서, 지리하고 답답한 한때를 보내는 듯 종일 어두운 기운을 내뿜었던 공공 씨의 어깨를 더욱 쳐지게 만드는 계기이기도 하다. 동료 노동자가 산재를 당하자 재빠르게 소독한 손가락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드물게 생동감과 현장감이 약동한다. 산재를 당한 동료 노동자는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철야를 마다하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허 웃으며 오늘 밤 동료들에게 소주 한잔을 쏜다고 약속했던 그이다. 감독은 예의 불친절한 병원에서, 잘려나간 살육을 처참하게 입증하는 빨간 손마디, 뭐 대수롭냐며 약속대로 소주 한잔을 외치는 노동자와 이를 딱하면서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전형적인 좁은 공간을 연출한다.
공공 씨의 반복될 하루는 좁은 골목길 한층 무거워진 뒷모습으로 마감한다. 인터내셔널가가 흐른다고 차마 당기지 못한 노조 사무실의 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투쟁가가 흐르는 노조 사무실에서 언성이 오가는 회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 옆에서 치열했던 노조 운동의 한때를 회상하며 깜풋 잠이 들어버린다. 증발할 수 없는 현실에서 여전히 맴도는 공공 씨의 캐릭터는 입체적이다. 공공 씨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영화이기에 그의 복잡다단한 면모들이 영화와 조우하는 지점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불쑥불쑥 등장하는 대사나 음악과 달리 안타깝게도 그의 캐릭터는 상당히 모호하고 빈약하게 드러나며, 시선의 주체가 되어야 할 그가 카메라의 눈에 포박된 대상이 되어 버린 순간이 종종 발견된다. 따라서 실제 노동 현장에 존재할법한 수많은 공공 씨의 다채롭고 깊은 속내는 짐짓 아리송한 물음표를 남기며 표현되지 못한다.
누군가는 <공공 씨의 하루>의 결말이 패배적이라 아쉽다고 이른다. 변화를 위하여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관계 맺기와 다양한 정서적 감흥을 동반할 수 있는 풍요로운 발걸음이 운동의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추구해야 할 목적이라는 문제제기가 등장, 크고 작은 실천이 진행 중이다. 운동/영화를 편리하게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선동을 위한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거나, 영화 언어에 대한 고찰의 필요성을 제기할 시 운동에 반한다는 지적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그리고 영화를 바꾸기 위해서 어떤 자양분을 제공해줄 수 있는지 자주 의구심이 든다.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는, '따분하다', '영화적이지 못하다' 는 식의 편향되고 광범위한 인식의 전환을 마련할 수 있는 영화들이 무성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