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ACT! 97호 Me,Dear] 활착

전체 기사보기/Me,Dear

by acteditor 2016. 2. 24. 12:57

본문

[ACT! 97호 Me,Dear 2016.03.07]


활착


김보람(ACT!편집위원회)








 활착(活着), 얼마 전에 알게 된 단어다. 위화의 <인생>이라는 책을 읽었다면서 친구가 알려줬다. 친구의 설명에 따르면 그 소설은 어느 박복한 남자가 생을 견디는 이야기인데, 부제가 ‘활착’이라고 했다. 책을 다 읽고보니 “날아서 떨어진 곳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더라고 친구는 말했다. 사전에서 활착의 의미를 찾아봤다. ‘옮겨 심거나 접목한 식물이 서로 붙거나 뿌리를 내려서 삶. 또는 그런 일’이라고 나와 있었다.






----------------------------------------


마지막 출근날, 회사를 돌면서 인사를 했다. 고생했다는 말부터 그 고달픈 바닥으로 왜 가냐는 말까지 반응들이 제각각.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첫 사회생활의 공간이었고, 다큐멘터리를 배우게 해준 곳이었으니 회사를 떠나는 지금, 더 큰 감정은 감사함이다. 130329


시간이 참 달게 가는 건 확실하다. 오후 햇살과 바람을 즐길 수 있고 4월에 내리는 눈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뭘 하고 지내냐”는 질문에 바로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건 당황스럽다. 응원과 격려 속에 시작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할 지는 잘 모르겠다. 스스로 일을 만들어 해야하는데... 혼자서 결정하고 책임지는 버릇이 안 되어 있으니 길 잃은 강아지처럼 주춤주춤. 이 낯선 세상에서 좌표 잃은 이방인처럼 굴고 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수동적인 삶에 젖어 있었음을 실감한다. 130412


내 이름을 걸고 창작을 한다는 것. 다큐는 글쓰기 만큼이나 무거운 작업이었다. 지금의 무게와 스트레스는 당연한 것. 기꺼이 감당해야하는 일. 131124


촬영은 언제나 긴장되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즐거운 사건이 많다. 시작이 어려울 뿐이지 가보면 의외로 쉽게 풀리는 일들도 많다. 이렇게 운이 좋을 수도 있나? 촬영은 가급적 소규모로 스며들어서 편하게 다니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소하고 소박한 태도로. 150715


편집을 하면서 몰랐던 내 모습이 나온다. 하나씩 알게 될 때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잠도 못 잔다. 다음날 다 깨달았다고 생각하면 또 나온다. 계속 잠을 못 자고 서성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깨져야 이 다큐를 완성할 수 있을까. 깨질만큼 얼른 다 깨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맨질맨질 알토란 같은 완성품이 나왔으면. 140108


내 문제에 천착해있던 시간동안 놓쳐버린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지금까지는 나를 위한 고민을 했으니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고민을 해보고 싶다. 다음 작업을 하게 된다면 내 감정을 넓게, 그리고 더 정제된 언어로 표현해보고 싶다. 140307


푸른영상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푸른영상이라는 공간에서 생활하게 될 내 모습이 아직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푸른영상에 갔을 때 김동원 감독님과 잠깐 얘기할 기회가 생겼는데 감독님이 씩 웃으시더니 “다큐를 해보니까 계속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하고 물어보셨다. “푸른영상에서도 수익사업을 해서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되는데 얘기는 들었니?”, “사무실이 이렇게 지저분한데 같이 지낼 수 있겠어?”라는 질문도 받았다. 딱 세 가지 질문이었는데 이 안에 푸른영상을 설명해주는 모든 게 다 있다고 느껴졌다. 중심은 ‘다큐’이지만 다큐만 할 수는 없고, 돈벌이도 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생활이 뒷전이 될 수도 있고, 지저분한 삶이 될 수도 있고... 이 모든 걸 감당할 수 있냐는 질문이었겠지? 어떤 삶이 될지 아직 잘 상상이 되지 않는데 어쨌든 다큐를 오래 하고 싶고, 더 잘 하고 싶기 때문에 푸른영상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140428


몇 달, 몇 년을 하나에 몰두해가며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 과정의 지난함과 흔들림까지도 즐길 수 있는 이들일까. 아니면 워낙 중심이 확고해서 흔들릴 겨를이 없는 사람들일까. 내 상황과 비교하느라 마음이 바쁘고 번잡하다. 140710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앞으로 두 번째, 세 번째 학생을 만날 것이다. 활동하면서 배우는 게 많다. 혼자 촬영을 하고 편집하는 법 뿐만 아니라 대상을 대할 때의 자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인터뷰할 때 잘 들어주는 일의 중요성. 평범하게 살았던 한 아이의 이야기를 기록된 삶으로 남기는 활동의 의미들도. 150617


촬영보조를 하면서 주인공들과 라포를 형성하는 자리에 주로 따라다녔다. 옆에서 보고 배운 것 중 하나, 믿음은 시간과 함께 쌓인다는 것. 단순하지만 중요한 깨달음이다.  150617


이전에는 수동적으로 사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면 지금은 주체적으로 내 삶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세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내 꿈대로 다큐를 오래 한다면 나의 ‘다큐 인생’은 아직 봄에 불과한데, 벌써부터 가을의 수확을 기대하는 건 스스로에게도 못할 짓이 아닐까. 조금 늦더라도 봄과 여름을 지나 만추에 이를 때까지 차근차근 가야겠다. 욕심은 내지 말고. 150713


할 일이 너무 많다. 작년에 이미 다섯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느라 그렇게 힘들어해놓고 또 이것저것 일을 벌였다. 허덕허덕.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앞에 놓인 일들을 해치우고 집에 돌아오면 쓰러져 잔다. 그렇게 하루가 흘러가버린다. 150618


상영회가 있는 25일까지 내가 제대로 편집할 수 있는 날들이 얼마나 되는지 세어봤다. 내일, 모레, 글피 반나절. 딱 2.5일. 남아있는 열흘 중에 절반의 절반만이 내가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나머지 7.5일은 생활비를 벌기 위한 알바와 교육과 각종 잡무들과 다른 약속들을 처리해야 한다. 번잡한 일정만큼 생각도 많아진다. 하루하루 작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이 스트레스로 다가온 지 꽤 오래 되었다. 붕 뜬 채로 흉내만 내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기분은 회사 다닐 때도 느꼈던 것 같은데...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140715


이사했다. 좋아하던 동네여서 웬만하면 옮기고 싶지 않았는데 더 이상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워져서 어쩔 수 없었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서 보증금을 내고나니 통장에 딱 18만원이 남았다. 돈이 없으면 사람이 쪼잔해진다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기억나는 밤. 150620


차근차근 자신의 길을 걸어 대기업으로 이직한 친구의 소식을 듣고, 나의 자리를 새삼 돌아보게 됐다. 친구의 상황을 나와 온전히 분리시켜서 친구의 이직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것이 왜 이렇게 잘 되지 않는 걸까. 사회적인 지위나 돈 벌이에 대한 욕심은 다 내려놓고 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150719


어떤 작업을 하고 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동네에 사는 개를 찍고 있어요”라고 답하는 일은 왠지 겸연쩍다. 괜히 듣는 사람들도 어색해하는 것 같고. 개의 역사는 푸른영상에서 만들고는 있지만 푸른영상의 작품이라고 당당히 말하기에도 여전히 망설여지는 지점이 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벗어버리지 못한 어떤 굴레 같은 것.


우리 삶에서 아주 커다란 문제들이라고 해도 결국은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아주 작은 무엇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안다. 미묘한 불안,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그것’을 나는 담아내고 싶다. 내 작업은 너무 소소하고 미미해서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곧 이야기의 허술함을 뜻하는 건 아니다. 작지만 지켜낼 가치가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이리저리 흔들릴지언정 뿌리 뽑히거나 사라져버리지는 말자고, 나답게 자리잡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외로운 와중에 다짐해본다. 150722


조급했다. 찍어야 될 사람을 만났을 때 인사도 없이 카메라부터 들었다. 양해를 구하지 않고 찍다가 지나가던 사람을 화나게 했다.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삼각대가 망가져버렸을 땐 그나마 남아있던 정신마저 사라져버렸다. 결국 내 불안이 그대로 화면에 담겼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화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회와 망쳐버린 촬영본 앞에서 망연자실. 촬영은 원래 망치면서 배우는 거라고 되지도 않는 위로로 마음을 애써 달랬다. 150816


편집본을 보여드리고 피드백을 받았는데 편집이 산만하다는 말을 들었다. 텍스트로 장면을 이해하지 말고 장면과 장면이 주는 힘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 “너만 아는 장면이다” “관객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편집은 정직하게 해라” 등등. 어렵다. 피드백을 받고 나니 기분이 엉망진창이다. 151118


가편시사를 이틀 앞두고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는다. 예민해진데다 한계를 눈으로 보니 괴롭다. 이야기가 없고 이미지도 없다. 어떤 쪽을 선택해도 비어있는 부분이 보인다. 4시간째 60초도 편집하지 못했다. 물론 이 고비를 넘어야 속도가 붙을 거라는 걸 안다. 결국 버티면 한발씩 가게 될 거란 것도 알지만. 버겁다 이 순간들이. 151220


작업을 작업 그 자체로 진지하게 봐주는 분위기.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이 부분이 아닐까. 가편시사를 하고 피드백 받은 내용을 정리하면서 불쑥불쑥 솟아나는 감사한 마음. 내가 여기 살아있구나! 라는 느낌. 160304


요즘 하고 있는 고민들을 돌아보면 결국 영화라는 것은, 그리고 영화를 한다는 건 결국 내 안에서 명명되지 않는 어떤 감정이나 정서들을 이미지와 사운드 안에 넣어서 하나의 언어로 느껴지도록 명명해주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이름없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그림자를 달아주는 것. 영화를 만든다는 건 그런 언어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닌가. 160211


이야기나 주제의 확장을 고민하고 있지만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전히 일기 쓰기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일기 쓰는 것들. 사적다큐에 대해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비판은 “자기 일기도 제대로 못 쓰는 것들”이라는 말이었다. 사적다큐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소리들을 예전부터 쭉 들어왔기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좋아하던 감독님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만큼은 마음이 서늘해졌다. 151226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생각해보니 요즘 집에서 잠도 제대로 자지 않는 것 같다. 가장 기본적인 수면 시간부터 지키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오늘 밤을 새면서 해야할 일을 정리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삶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왜 정작 내 삶을 챙기지 않고 있는지. 160130


회사 다닐 때랑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지쳤고 내 업무가 아닌 다른 일에 시간을 뺏기고 돈벌이 때문에 내키지 않는 일들을 해야하고, 때로는 그 일이 더 주요업무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악몽이 반복되는 것 같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씁쓸한 기분은 여전하다. 결국 직장인이든 다큐감독이든 다 똑같은 패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160229


요즘 상영회에 가면 내 영화로 사람들을 만났던 날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잘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커지는데 실력은 안 늘고 밑천만 드러나는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일임에도 잘 하지 못한다는 괴로움. 여유시간을 갖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 부족함을 어떻게 채워나가야할지 고민이 된다. 왜 계속 이 길이어야 하지? 왜 다큐를 하고 있지?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명쾌하게 답할 수가 없다. 160206


이제 막 작업을 시작하는 분들이 푸른영상에 와서 작업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때가 그립다. 서로의 작업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애정을 가지고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었던 그때, 서로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줬던 그때, 뭔지 모르겠지만 같은 공기 안에 있었던 그때. 와글와글, 서로의 작업에 대해서 이 구성이 좋네, 이 장면은 별로네, 저런 편집은 어떻네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보며 그 달뜬 분위기와 설렘이 부러웠다. 160212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 계속 이 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이 된다고, 뒤늦게 위기의식이 생긴 것 같다고 선배에게 이야기했다. 눈앞에 놓인 계단을 차곡차곡 밟고 오르는 게 아니라, 마치 클라이밍을 하듯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돌 하나에 의지해 부들부들 떨면서 올라가고 있는 것 같다고 얘기했다. 내 얘기를 한참 듣던 선배의 답은 “아마 십년 뒤에도 그 위기의식은 계속 있을 걸?” 


처음 다큐를 시작했을 때 선배들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느꼈던 시기가 있었다고 했다. 답답해서 한동안 계속 책 읽고 영화 보고를 반복했던 시기가 있었다고. 그때 봤던 자료들이 다 기억나진 않지만 그렇게 영화를 만들던 어느 순간에 “아, 다큐가 이런 건가?”라는 깨달음이 왔다고. 그 순간이 정말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고 했다. 

아직은 느껴보지 못한 그 순간이 나한테도 오게 될까. 그날을 위해서 지금은 안으로 부지런히 무엇이든 채워넣어야 할 시기가 아닐까.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하루씩 더 가기 위해서. 160309


----------------------------------------


활착에 대해 좀 더 검색했을 때 이런 블로그 포스트를 발견했다. 이른바 활착의 조건이다. “식물을 막 옮겨 붙인 뒤 뿌리가 움직이기 전에는 물을 자주 주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일단 뿌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일정 기간 동안 물주기를 자제해야 한다. 이 시기엔 식물이 위로 성장하는 것보다 아래로 뿌리를 내리며 활착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마름이 지속되면 뿌리는 더 가늘고 길게 내려가며 바닥에 밀착하게 된다. 활착이 완성되면 다시 성장이 시작된다.”


----------------------------------------


그동안 넘치도록 물과 양분을 주셨던 액트편집위원회 감사합니다! □




[필자소개] 김보람 (ACT!편집위원회)


2012년 미디액트에서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 수업을 들으며 미디어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자립하는 모든 것들에 관심이 많다. ACT!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공동체 라디오, 독립 영화 분야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고 싶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