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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71호 리뷰] 불편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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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1. 2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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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71호 / 2010년 9월 30일

 

 
 
 
불편해도 괜찮아?
 
 
윤티(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

 

 

 

 

 

이 책의 저자는 고대 법대에 나와 외국 대학원을 졸업하고 또 감탄할 만한 직업들을 거친 기독교 이성애자 남성이에요. 이 사회에서 정말 불편하고 걸리는 것 없게 사는 주류인생인데 이런 글을 썼다는 게 놀랍지만 어떻게 보면 대학은 물론 못가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한 하루 14시간 알바로 살아가는 범성애자 청소녀가 이 책을 바라보는 시선은 좀 더 불편했고 그래서 꼬집을게 많은 책이기도 해요. 
 

 

 

나에게 특수성을 부여하지마!

 

 

오늘 아침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저를 부르셨어요.

 

 

“학생!”

 

 

무슨 일 인가해서 할머니를 보니 할머니가 자기 머리 색깔과 내 머리 색이 같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제가 얼마 전 탈색과 염색을 반복해서 잿빛금발머리를 얻어냈거든요. 그래서 그냥 웃고 넘어 가겠구나 이렇게 생각했더니 욕설을 하기 시작하시는데 “어린것들이 머리를 저렇게 염색하고, 저런 애들 다 머리채 잡고 불로 태워 버려야 돼 라는 말을 순식간에 내뱉으시더라구요.” 나이가 어리고 머리가 하얗다는 이유만으로도 누군가로부터 앞과 같은 생각의 대상이 되어야한다니, 이건 누가 봐도 끔찍하고 불편한 일 일거에요.

 

 

그럼 이 문장은 어떠세요?

 

 

“우리 아이들을 살리는 출발점이 ‘학생도 어른과 똑같은 인간이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본문 50페이지)

 

 

이 문장 혹시 불편하지 않으세요? 저는 불편해요. 학생도 어른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했는데 ‘우리 아이들'이라는 단어로 청소녀(년)들을 써있어요. 문제없어 보이는 단어이고 청소녀(년)을 바라보는 따듯한(?) 시선일진 모르지만 ‘어른'을 이런 식으로 표현해 쓰여져 있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이 책에서 표현한 ‘지랄'은 어쨌든 이 책을 쓴 저자가 ‘청소녀(년)‘에게 바라는 상이 있고 그 모습만으로 존재하지 않아 '지랄‘이라는 단어를 계속 언급하며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네요. 시선은 비(比)청소녀(년)을 유지하면서 지금 청소녀(년)들의 행동에 대해 '지랄 총량의 법칙‘로 표현을 하고요. 만약 청소녀(년)이 비청소녀(년)을 표현할 때 '지랄‘을 써가면서 말한다면 어떠신가요? 당신네들(비청소녀년)이 보는 시선 말고 우리(청소녀년)들의 시선은 도대체 어디있는 거죠? 청소녀(년) 인권부분은 청소녀(년)들이 편하게 읽고 같이 분노할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청소녀(년)들을 어느 특수한 개체로 놓고 보지 마세요. 청소녀(년) 뿐만 아니라 비청소녀(년)도 미망(迷妄)의 시기를 보내지 않고는 성숙이 없다는 것(25p)도 잊지 마세요.

 

 

등급?!?!?!?!?!?!?!?>!?!?!?!?!?!?!?!?!?!?!?!?!?!?!?!?!?!?

 

 

지난번 어느 청소년영화제 본선에 올라간 적이 있어요. 원하지도 않았는데 상영할 때 보니까 내 영화는 등급이 매겨져 있더라고요. 그리고 GV에서도 진행자가 장난스럽게(?) 그 영화 때문에 이 섹션의 등급이 올라간 거라며 말하기도 하구요.

 

 

제 영화가 왜 15세 등급이란 딱지를 붙이게 된 걸까요? 영화제 측에서는 영화마다 이 나이쯤 이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리고 상영을 하려면 등급을 붙여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근데 너무 억울합니다. 제 영화는 선정적이라고 하기에는 어쩌면 그보다 더한 ‘야한 동영상'소재의 것들도 있는데 여성의 성을 다루고 있기에 그리고 그런 것을 거르지 않고 보여줘서 이런 등급이 나온 걸까요? 상영관에 들어가지 못한 관객을 보니 저 관객이 꼭 봤으면 좋겠는데 하고 슬퍼지네요.

 

 

이런 등급들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주류에 가까운지가 혹시 기준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영화 ‘친구사이?'의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 딱지를 때어내는 데 승소했어요. 영상물 등급위원회(영등위)는 성적정체성이 미숙한 청소년이 건전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을 저해한다면서 청소년이 이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었죠.

 

 

하지만 재판부는 이 영화가 청소년들에게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성적 정체성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교육적인 효과를 제공하고 있음이 분명하고, 청소년이라고 해서 동성애를 내용으로 한 영화를 수용하기 어렵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이 영화에서 다루는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청소년들의 인격형성에 지장을 초래하기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영등위는 동성애코드가 청소년 성정체성에 교육적이지 않기 때문에 ‘청소년 관람불가'등급이 유효해야한다 하고 재판부는 동성애를 다루고 있어 교육적인 효과를 제공하고 있다하니 영등위의 불편함에 대한 시선이 노골적으로 보이는 판정이 아니었나 싶네요.

 


전 모든 영화에 등급이 있다는 사실이 불편해요. 사람마다 영화를 선택하는 것도 받아드리는 것의 범위도 나이에 상관없이 다 다를 텐데 어느 누구의 시선으로 어떻게 등급이 나눠지는 건지도 모르는데 나오는 등급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니 말이 안 되지 않나요.

 

 

서로 보이지 않는

 

 

작년부터 계속 일해 먹고 살고 있어요. 저 같은 청소녀는 사실 알바 말고 돈 벌 방법이 없어요. 요즘은 보증금 모으려고 하루에 14시간동안 투잡을 해요. 야간알바를 뛰고 아침에 다시 오전알바를 하는 방식이죠. 그러면 하루에 14시간일하고 1시간 밥 먹는다 쳐도 9시간 밖에 남지 않아요. 이동하고 자고 일어나면 다시 일을 가야되고요. 그래서 한 달 월급이 얼만지 궁금하지요? 무려 120만원이에요. 제가 ‘무려' 120만원이라 한건 사실 저는 알바라도 구한 케이스잖아요. 다른 친구들은 청소녀이기 때문에 일 구하기 자체도 어려워요. 일을 구해도 비청소녀년과 같이 일, 같은 양을 일하고도 청소녀년이기에 쉽게 대하고 쉽게 부려먹죠.

 

 

그래서 사실 이 책 노동부분에 주로 담긴 ‘노조'와 ‘회사'의 싸움에 좀 아쉬웠어요. 저 말고도 노조가 없는 곳에서 일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많을 거예요. 전 까페에서 야간에 일하는데 야간수당 없이 시급 4500원을 일하고 있어요. 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네요. 당연한 걸 받는 건데도 말하기가 어려워요.

 

 

이 책에 언급된 [빌리 엘리어트]의 노동자도 현실 노동자를 볼 때도 노동자는 대부분 ‘사용자(고용주)'가 있고 필요에 의해 마음대로 자르거나 바뀌어 질 수 있는 일터의 소모 부속품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요. 같은 노동자끼리 ‘배신자'라 불리며 토마토와 계란을 맞는 장면을 볼 때면 가슴이 아파요. 책에서는 ‘약자의 이익'이라하지만 사실 그 돈이 이익이 될 수 없고 어쩌면 사용자가 주는 작은 돈으로 살아가야하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그 최소한의 것을 가지고 사용자가 이익이라 따지고 계산하려 들고 있는 이 세상 너무 밉네요.

 

 

지금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사회계급도 대부분 노동자들의 차이에서 일어난 것이지 않을까요?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도, 그 병원을 닦고 있는 청소부도 전부 한 병원의 노동자 인데 왜 다른 대우를 받고 있어요. 물론 의사가 되기엔 많은 노력이 필요했겠지만 임금으로 보이는 그런 어마마한 차이가 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결국 그런 돈 많이 받는 직업들을 하기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었을 테니까 항상 돈 있는 사람은 돈 벌수 있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지 않았나싶어요.

 

 

점점 더 많이 알게 되고 볼수록 살기 더 불편해집니다. 아니 불편하다 하기보단 가슴 아픈 일들이 너무 많이 보여요.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타자의 입장에서 ‘괜찮아'하지만 말고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찾아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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