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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2호 이슈와 현장] 창작자와 노동자 사이, 2018 방송 노동환경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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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8. 12. 5.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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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2호 이슈와 현장 2018.12.14.]


창작자와 노동자 사이, 2018 방송 노동환경을 돌아보며


김한별(ACT! 편집위원)



  2018년 10월 26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CJ ENM 센터 앞에서 故 이한빛 피디를 기리는 추모 문화제가 열렸다. 마포구 상암동. tvN 드라마 <혼술남녀>를 제작한 CJ ENM과 같은 방송국, 수많은 외주 프로덕션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곳에 많은 방송 스태프들이 마음 한 켠 그에게 빚진 마음을 안고 모였다. CJ의 정규직 피디로 입사해 tvN 드라마 <혼술남녀> 팀에서 일했던 故 이한빛 피디. CJ에서 받은 첫 월급을 세월호 유가족과 기륭전자 노조, KTX 해고승무원 복직 투쟁을 위한 후원금으로 썼을 만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컸던 그에게 닥친 이 참담한 노동 현장은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곳이었을까.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그가 남긴 유서의 일부분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렀다. 


▲ 2018. 10. 26. 故이한빛 PD 2주기 추모제 ‘12 ON 12 OFF’ (출처:전국언론노조) 

이번 2주기 추모문화제 이름은 ‘12 ON 12 OFF’. 

12시간 일하면 12시간 쉬자는 의미다.



  故 이한빛 피디가 떠나며 방송 노동의 부당한 현실이 사회에 알려진 이후에도 여전히 방송 스태프들은 죽거나 다치고, 초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하지만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존재해왔던 수많은 관행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는 그냥 묻혔던 제작 현장의 사고들이 이제는 스태프들의 입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초장시간 노동, 최저임금에 미치지 않는 페이, 상품권으로 임금을 받는 등 열악한 상황에 대한 고백들이 이어졌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자 방송 스태프들은 더 이상 안되겠다며 함께 모여 공개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의 죽음이 방송 스태프들을 깨어나게 한 것이다. 



범 방송계 비정규 스태프들의 노조,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출범


  방송 스태프들이 모인 SNS 익명채팅방에서는 하루가 멀게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올라왔다. 하루 20시간이 넘도록 촬영장을 지키는 드라마 스태프부터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왕복 8시간이 넘는 거리를 밤새 운전해 카메라와 삼각대, 노트북, 드론까지 혼자 들고 촬영을 다녀왔다는 독립피디의 이야기까지.. 방송 비정규 스태프들은 그렇게 자신의 노동 현장을 이야기하고 안부를 물으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故 이한빛 피디의 죽음과 작년의 故 박환성, 김광일 피디의 사고로 알려진 방송사의 갑질이 기폭제가 되었고 결국 2018년 7월 4일,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를 출범시켰다. 독립피디와 촬영 감독, 드라마 스태프 등 직군을 아우르는 범 방송계 비정규 스태프들이 모인 최초의 단체가 된 것이다. 


▲ 2018. 7. 4. 민주노총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출범식 

(출처: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방송스태프노조는 출범 이후 부당노동 금지, 계약서 체결을 외치고 있지만, 아직도 드라마 현장에서는 하루 2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과 ‘턴키계약’ 관행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턴키계약’은 조명팀, 동시녹음팀과 같은 한 직군별로 용역료 산정 기준 없이 총액만을 명시하는 도급계약을 말한다. 이 경우 방송사는 스태프 관리와 고용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가 되고 계약을 한 도급 감독은 방송사나 제작사와 계약을 한 동등한 ‘사업자’로 보여진다. 하지만 방송스태프노조는 도급 감독들이 사실상 관행으로 계약을 체결했을 뿐, 방송사와 감독의 업무 지시를 받는 노동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드라마 스태프들이 제작사와 개별계약을 맺는 데에도 이 턴키계약은 큰 걸림돌이 된다. 지난 9월 고용노동부가 턴키계약을 맺고 있는 도급 감독들을 노동자가 아닌 ‘사용자’로 규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용노동부가 방송계 부당 노동 관행에 힘을 실어준 셈이 되었고 여전히 드라마 제작 현장의 턴키계약 관행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게다가 최근 영화 스태프의 드라마 유입이 잦아지면서 영화제작 현장에서 개별계약을 맺던 스태프들이 드라마 제작 이후 턴키계약을 진행하는 사례까지 발생하는 상황. 방송스태프노조는 영화산업노조와 함께 이에 대해 방송사와 제작사의 강력한 개선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출범 이후 첫 돌 맞은 ‘방송작가유니온’


  방송계 대표 비정규 인력인 방송작가는 방송 제작에 핵심 역할을 하면서도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했다. 20여 년 넘게 고료가 오르지 않아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하루아침에 해고되어도 이를 해결해줄 수 있는 법적인 테두리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작년 11월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별칭 ‘방송작가유니온’을 출범시키며 방송작가들이 방송 노동 현장에서 경험한 부조리를 스스로 이야기하겠다고 나섰다. 노조라는 든든한 우산을 만난 방송작가들은 출범 1년 만에 대구MBC와의 단체협약과 안동MBC 원고료 협상을 이뤄냈고 앞으로 본사를 포함한 전국 방송사와의 단체협약과 계약서 체결을 목표로 제시했다. 김환균 언론노조 위원장은 언론노조 출범 30주년을 맞아 방송작가유니온을 ‘언론노조의 미래’로 소개하면서 방송계 비정규직을 끌어안겠다고 이야기했다. 방송작가지부 출범을 통해 ‘비정규직 상생’이라는 시험대에 오른 언론노조는 이제 행동으로 그 의지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방송작가들의 계약서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소속 박선숙 의원은 KBS에서 일하고 있는 방송작가 691명 중 13명, 단 1.9%만이 계약서를 작성했다고 밝혔다. 방송작가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이 수치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KBS 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정감사에서의 지적이 있고 난 뒤 바로 다음 날, KBS는 곧바로 문체부 표준계약서를 바탕으로 한 계약서를 작가들과 체결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동안 계약서가 작가를 보호해주지 못하고 해고의 정당성만 부여해 준 지난 과거에 비춰보았을 때(*주1), 계약서가 악용될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방송작가유니온은 계약서가 방송작가들의 방송 제작 현실을 반영해 악용될 소지를 막고 방송작가의 노동권을 실질적으로 보호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비정규직 tbs 스태프들 노조 만들다


  tbs는 서울시 산하의 교통전문방송사로 조직 내 관료제의 성격이 묻어있는 곳이다. tbs 소속 피디들은 임기제 공무원이고 tbs는 프리랜서를 제외한 인력 290명 중 262명이 비정규직이다. 피디, 작가, 기자, 리포터 등 다수의 제작 인력을 비정규로 운영하는 것이다. 그러던 2018년 1월 19일, tbs 내부의 비정규 인력들이 모인 ‘언론노조 tbs지부’가 출범했다. 이들은 상시 지속 업무 정규직화, 동일 가치 노동-동일 임금 적용, 근로계약 체결을 목표로 제시했다. 


▲ 2018. 1. 19. 민주노총 언론노조 tbs지부 출범식 (출처:전국언론노조)



  그러다 며칠 뒤인 1월 24일, 故 이한빛 피디의 서른 번째 생일날 tbs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가 발표되었다.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맞물려 순항을 탄 것이다. tbs를 재단법인화하고 내부의 비정규 방송 스태프들을 직접고용 계약직으로 우선 전환한 뒤, 단계적인 정규직화까지 이뤄내겠다는 방침이었다. 이후 tbs 다수의 비정규직은 직접고용 계약직으로 전환되었고 많은 방송 비정규 스태프들은 tbs가 공정방송노동의 선례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최근 직군별 차별 등 고질적인 tbs의 사내 문화로 정규직 전환 작업이 난항을 겪고 있다. 


  11월 1일 진행된 ‘서울시 방송노동환경 혁신정책 중간점검 토론회’에서 조성주 서울시 노동협력관은 ‘작가는 해고 위험이 있어야 크리에이티브해진다.’라고 말한 tbs 간부의 이야기를 전했다. 조 협력관이 ‘피디는 창의적인 직업이 아니냐’ 되물으니 ‘피디는 창의적일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주2). 스태프의 고용 안정이 콘텐츠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우려는 전형적인 착취의 논리다. 그리고 이는 여타 방송사가 방송 비정규직 스태프들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기도 하다. 이번 tbs 간부의 발언으로 그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창의적일 필요가 없는 피디’들이 방송을 제작하며 도태되고 있는 자신들의 문제점을 비정규 스태프들에게 떠넘긴 셈이다. 



결국, 방송 스태프도 노동자다


  2018년 한 해는 방송계 관행들이 유독 많이 드러난 해였다. 이는 숨어 있던 방송 스태프들이 힘을 합쳐 목소리를 냈고, 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위의 방송계 공정노동을 위해 만들어진 세 단체가 함께 이야기 하는 것은 방송 제작 현장에서 스태프들에게 노동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것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지난 11월 9일 한국방송협회, 한국독립피디협회, 한국방송영상제작사협회,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PD연합회,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등 방송계 7개 단체가 모여 ‘상생 방송제작을 위한 독립창작자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방송통신위원회와 함께한 방송계 7개 단체들이 방송 스태프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방안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초안에 있던 최저임금 보장, 서면 계약서 체결, 안전 관련 법령 준수, 방송 연장과 조기종영 등의 정보를 스태프와 공유, 성폭력 구제조치, 방송 스태프가 참여하는 ‘상생협의체(가칭)’ 운영 등의 실질적으로 스태프를 보호할 수 있는 내용 대부분이 빠져 많이 달라진 최종안이 나왔다. 너무나 당연한 노동 권리를 이야기하는데도 방송사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비정규 스태프들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채 많은 내용이 빠진 이번 ‘독립창작자 인권선언’은 그동안 방송사들이 비정규직 스태프들의 인권을 짓밟고 착취해왔다는 점을 인정함과 동시에 결과적으로는 헌법 수준의 인권을 재확인한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실질적인 힘을 갖고 방송사를 움직일 수 있는 방통위가 가진 권한에 비춰보았을 때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게다가 방송 스태프를 ‘독립 창작자’로 규정한 것은 결국 턴키계약을 맺고 있는 도급 감독들을 노동자가 아닌 ‘사용자’로 규정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제작 현장에서 대부분의 비정규직 스태프들이 방송사 정규직 피디로 대표되는 방송사의 근로 지시를 받고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약 형식만을 고려해 이들을 개인사업자로 분류하는 현재의 노동 사각지대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2018. 11. 9. ‘상생 방송제작을 위한 

독립창작자 인권선언문 선포식’ (출처:방송작가유니온)

방송작가유니온은 초안의 내용들이 대폭 삭제된 것에 유감을 표하며 

인권선언 서명에 동참하지 않고 선포식 현장에서 피켓팅 시위를 진행했다.



  그동안 방송 스태프들에게 ‘창작자’라는 허울 좋은 호칭은 ‘착취’의 또 다른 명분으로 기능해왔다. 방송 비정규 스태프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의 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故 이한빛 피디의 죽음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현재의 방송 노동환경은 모두에게 고통이다. 작년 11월, 방송작가유니온은 ‘방송 콘텐츠를 눈물로 제작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는 말로 출범의 포부를 밝혔다. 그렇다. 누군가의 눈물로, 착취로 콘텐츠의 경쟁력을 만드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 방송 스태프들을 창작자가 아닌 노동자로 인식하는 패러다임 전환이 그 시작이다. □



*주1 : ‘SBS 뉴스토리, 표준계약서를 해고 수단으로 악용’ 미디어스 2018.03.15.

*주2 : ‘tbs 작가 “새벽 4시까지 원고쓰고 애 낳으러 갔다”’ 미디어오늘 201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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