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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09호 이슈와 현장] 2010 영상미디어센터 공모를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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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8. 5. 18.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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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원고는 5/24(목) 미디액트 후원의 밤을 맞아 먼저 발행됐습니다. 



[ACT! 109호 이슈와 현장 2018.05.30.]


2010 영상미디어센터 공모를 돌아보며


최은정(ACT! 편집위원)



  2010년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영상미디어센터(이하 센터) 운영 사업자 공모에 미디액트 모법인인 한국영상미디어교육협회는 총 277쪽의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큼직한 책 한 권이 나왔다. 몇 달을 매달린 결과였다. 2002년부터 2009년까지, 8년의 센터 운영 성과를 정리했고, 미디어 환경 변화를 분석하면서 계획을 구체화했다. 수차례 긴 회의를 했고, 수치 하나까지 맞추며 여러 번 교정했다. ‘미디어센터 3.0’을 내세운 이 계획서에 대해 당시 이주훈 미디액트 사무국장은 “미디액트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고 말했다. 면접 심사를 앞두고는 몇 번의 발표 연습이 있었다. 김명준 미디액트 소장은 어투와 옷매무새까지 신경 썼다.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액트는 선정될 수 없었다. 심사 자체가 불공정하고 비상식적이었기 때문이다. 


  

▲ 2010 영진위 센터 사업 운영자 공모

미디액트 사업계획서



  2009년 12월 22일. 영진위는 센터와 독립영화전용관(이하 전용관) 사업 운영자 공모 심사 결과를 “적정단체 없음으로 재공모”라고 공지했다. 2010년 1월 22일 다시 공모 심사가 진행됐고, 2010년 1월 25일 센터는 시민영상문화기구, 전용관은 한국다양성영화발전협의회가 선정됐다. 

  시민영상문화기구는 2010년 1월 6일 설립됐다. 센터 재공모는 그로부터 6일 후인 1월 12일 공지됐다. 선정단체 사업계획서는 총 67쪽으로 2009년 12월 신청한 문화미래포럼과 비상업영화기구 컨소시엄(이하 컨소시엄)과 거의 같았다. 일부 표기가 달라졌고 중기계획안 몇 쪽이 추가됐다. 심사위원 명단엔 컨소시엄 분과 회원과 전문위원이 포함돼 있었다. 조희문 당시 영진위 위원장도 컨소시엄 관계자였다.

  얼마 후 국회와 언론을 통해 심사 점수가 알려졌다. 두 번의 공모 심사에서 미디액트와 전용관 공모에 참여한 인디포럼작가회의는 1위에서 2위로 바뀌었다. 선정된 두 단체는 5개 신청 단체 중 5위였다 1위로 올라섰다. 

  2009년 12월과 2010년 1월 사이, 새로운 단체가 생겼고, 5위 단체 관계자가 심사위원이 됐고, 거의 같은 사업계획서가 5위에서 1위가 됐다. 


 

 

▲ 왼쪽은 5위 단체 오른쪽은 선정단체 계획서. 

제목 연번이 바뀌었다.



 

 

▲ 왼쪽은 5위 단체 오른쪽은 선정단체 계획서. 

밑줄이 추가됐다.



 

 

▲ 왼쪽은 5위 단체 오른쪽은 선정단체 계획서. 

표 색깔, 크기, 제목 위치가 바뀌었다.



  심사 결과 발표 다음 날인 1월 26일, 미디액트 스탭들은 “납득할 수 없는 결과”라는 입장을 밝혔고, “영진위의 즉각적 사과와 철회를 요구”했다. 5일 후 “모든 사업을 중단”하고 “공간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알렸고, 공모와 심사의 문제점을 짚으며 제출했던 사업계획서도 함께 공개했다.

  발표 이틀 뒤인 27일, 서울 홍릉 영진위 앞에서 ‘센터 사업 운영자 선정 결과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 후 미디액트 대강의실에서 향후 대책을 논의했고, 이 자리에서 ‘영상미디어센터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모임 - 돌아와 미디액트(이하 돌미)’가 만들어졌다. 


▲ 2010.01.27. 서울 홍릉 영진위 앞

센터 사업 운영자 선정 결과 규탄 기자회견

 

▲ 2010.01.27. 서울 광화문 미디액트 대강의실

‘돌아와 미디액트’ 첫 모임



  ‘돌미’는 미디액트를 자주 오가던 2-30대 수강생들과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이하 전미네)를 비롯한 미디어 활동가들이 주축이었다. 무엇이든 “재밌게 하자.”는 말이 자주 오갔다. 바로 기자회견을 준비했고, 1월 29일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심사를 발로 했습니다.”를 내걸고 ‘센터 사업자 선정 철회를 요구하는 시민 기자회견’을 열었다. 

  같은 날 9인의 독립영화 감독과 제작자는 ‘센터와 전용관 사업 운영자 선정 결과에 깊은 우려를 표하는 영화인 기자회견’이 열렸고, “전문성이 결여된 이들이 맡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히며, “심사 기준과 과정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 2010.01.29. 서울 광화문 문화체육관광부 앞

기자회견 “심사를 발로 했습니다.”

 

▲ 2010.01.29. 센터와 전용관 선정 결과에 

깊은 우려를 표하는 영화인 기자회견



  이 와중에 미디액트 스탭들은 짐을 쌌다. 예견된 파행 운영에 미디액트가 빌미를 주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5일 안에 8년 동안 쌓인 짐을 정리해야 했다. 짐을 싸다 울컥해 밖으로 뛰쳐나간 사람도 있었다. 나오기 전 날인 1월 30일 곧 다시 만나자며 ‘씨유쑨 미디액트(See You Soon Mediact)’를 진행했다. 갑작스런 공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수강생, 강사, 제작자, 미디어교육 교사, 지역 미디어 활동가들, 전(前) 스탭 등 200여 명이 참여했다. 김명준 소장은 사업계획서를 소개하고 면접 심사 발표를 재현했고, 심사위원이 센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되묻던 면접 심사 현장이 공유되기도 했다. 참여자 모두 울고 웃었고 이튿날 스탭들은 그 곳을 나왔다.

 

 

▲ 2010.01.30. 씨유쑨 미디액트



  영진위 파행에 대한 항의 행동은 계속 됐다. ‘돌미’는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1인 시위 음악회’를 진행했고, ‘전미네’와 함께 시민영상문화기구가 들어선 센터를 찾아 공개 질의를 하기도 했다. 해외 미디어 단체들은 미디액트를 지지하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2월 2일 이 의견들을 모아 “미디어 민주주의의 사망 (Death of Media Democracy)”이라는 기자회견을 했다.

  영화인 공동 행동도 이어졌다. 2월 18일 “불공정하게 선정된 독립영화상영관에서 상영하지 않겠다.”는 독립영화 감독 기자회견이 있었고, 3월 16일에는 센터,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 한국영화아카데미 등 영진위 파행을 규탄하며 영진위 정상화를 촉구하는 ‘영화인 1천인 선언’이 있었다. 5월 25일엔 독립영화 지원 심사에 특정 작품 선정을 강요한 조희문 전 위원장을 국민권익위원회에 부패행위로 신고를 접수하며 사퇴를 촉구하기도 했다. 


 

▲ (왼쪽) 2010.02.10. ‘돌미밴드’ 1인 시위 음악회 

(오른쪽) 2010.02.17. 공개질의 “시민영상문화기구, 질문 있습니다.”


 

▲  (왼쪽) 2010.02.02. 국제행동 기자회견 “미디어 민주주의 사망?”

(오른쪽) 2010.03.16.  '영진위 정상화를 촉구하는 영화인 1천인 선언'


 

▲ 2010.05.05. 공모 발표 100일 기자회견 “영진아, 우리 뒤끝 있다.”

기자회견 후 전달한 쑥과 마늘



  ‘돌미’ 활동은 공모 발표 100일 기자회견 ‘쿨~하지 못해 미안해, 영진아 우리 뒤끝 있다.’를 끝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상암 미디액트 재개관이었다. 갑작스런 결정에 기댈 곳이 없었던 미디액트 스탭들은 김명준 소장 지인의 도움으로 상암에 터를 잡았고, 수강생들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페인트칠을 했다. 후원금, 물품 기증, 강사비 기부 등도 이어졌다. 5월 14일 재개관식을 했고, 슬로건은 “빚 갚고 빛나자.”, 축하공연팀은 ‘돌미밴드’였다.


▲ 2010.05.09. 상암 미디액트 환경미화의 날

 

▲ 2010.05.14. 상암 미디액트 재개관식 

‘돌미밴드’ 축하 공연



  안타깝게도 재정난은 계속됐다. 벽을 세우고 책상과 의자를 마련하고 최소한의 장비를 들여오면서 억대의 빚이 쌓였다. 공적 지원 없는 공적 운영은 또 다시 빚을 낳았고, 스탭 인건비와 강사비를 낮추고, 수익 사업을 늘려도 한계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용자들과 좀 더 소통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상암에서 처음 연 토론회 ‘돌미와 함께 미디액트 새 꿈 찾기’에서는 미디액트와 ‘돌미’의 의미, 영진위 항의 행동과 상암 재개관 과정에 대한 평가와 토론이 이어졌다. 



▲ 2010.10.15. 상암 미디액트 첫 번째 토론회 

‘돌미와 함께 미디액트 새 꿈 찾기’



  3년 후인 2013년 미디액트는 홍대 이전을 결정했다. 지리적 접근성을 높이고 운영비를 절감하기 위해서였다. 좀 더 친숙한 지역을 물색했고, 좁아진 공간을 조금이나마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수차례 도면을 바꾸며 회의를 했다. 그리고 다시 짐을 쌌다. 다시 벽을 세웠고 다시 수강생들의 도움을 받아 천장과 벽을 칠했다. 그 사이 짐이 꽤 늘어, 이삿날 사다리차에 실려 창문으로 밀려오는 짐들을 옮기다 숨이 막혔다는 사람도 있었다. 2013년 6월 17일 11주년 행사와 함께 겨우 홍대 미디액트 개관식 겸 이전 파티인 ‘이전취식’을 할 수 있었다. 


 

 

▲ 2013년 3월. 홍대 미디액트 공사 현장



  다시 3년 후인 2016년 말. 언론 보도를 통해 미디액트가 박근혜 블랙리스트에도 올라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명박 블랙리스트로 인한 피해는 충분히 경험했지만, 그 이후 관련 분야로 지원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좀 의외였다. 역시나. 공개된 문건은 사실과 달랐고 성의조차 없었다. 아마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이 같은 허술한 문건들 때문에 수많은 예술가들과 단체들이 지원에서 배제됐고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했다. 시대가 바뀌었고 적폐 청산과 정책 혁신을 우선 과제로 삼고 있지만 사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멀다. 미디액트가 불공정하고 비상식적인 공모로 내몰린 후, 빚과 과로에 시달리며 버텨온 시간을 되짚다보면, 결국에는 다시 보게 되는 8년 전 사업계획서를 보고 나면 더욱 멀게 느껴진다. 좀 더 빨리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과 함께. □



* 5월 24일(목) 오후 6시 신촌 하이델베르크하우스에서는 미디액트 후원의 밤이 열린다. 8시부터 간단한 공식 행사가 진행된다. (후원계좌: 우리 1005-301-656973 미디액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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