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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호 현장] 동네공원도 상영과 선동의 훌륭한 공간 - 대구 성서와룡공원 상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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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제1호 / 2003년 7월 18일 

미디어 현장 1

동네공원도 상영과 선동의 훌륭한 공간
- 대구 성서와룡공원 상영회

 
이경희(<노동자의 눈> 교육 영상기획)
 
이윽고 노래공연이 끝나고 공원 중앙을 비추던 커다란 가로등이 꺼졌다. 빔 프로젝터에서 내뿜는 미세한 입자들이 빛기둥이 되어 커다란 흰 천에 닿는 순간 주위마저 고요해진다. 드디어 상영하는구나... 영상물을 제작하기 위해 함께 현장을 돌아다녔던 노조간부들, 캠코더 앞에서 수줍어하던 현장 조합원들, 그리고 대부분이 반바지 슬리퍼 차림인 주민들까지 숨죽이고 바라보고 있다.
"저거 목공 *** 아이가?"
"형님요, 실물보다 더 잘 나온 거 아잉교? 사기를 이래 쳐도 되나!"
조합원들이 무리지어 앉은 이곳저곳에서 함성과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오늘의 영상물("건설노가다로 산다는 것은...")은 노동자들에겐 자신들의 삶, 주민들에겐 어쩌면 이웃일지도 모르는 옆집 아저씨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일 게다. 상영하는 동안 캠코더를 들고 어슬렁거리면서 사람들의 표정을 담는다. 어두운 조명아래 보이는 것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입가의 미소뿐이지만 모두가 진지하고, 후끈하다. 상영직전까지 갑작스런 편집수정작업을 해야 했던 스트레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순간이다.
 
이날의 상영회는 대구지역건설노조가 기획한 <건설노동자 한마당> 행사의 일부로 마련되었다. 그리고 <건설노동자 한마당>은 성서공단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대위가 매주 성서와룡공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수요공연>과 결합한 행사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상영회는 <건설노동자 한마당>과 <수요공연>에 이중의 덕을 본 셈이다.
따라서 관객 구성도 측면에서도 건설노조가 조직한 100여명의 노동자들과, 매주 수요일이면 와룡공원을 찾는 200여명의 지역주민들이라는 기묘한 결합을 이뤄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날 상영회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노동자들이 처한 삶의 조건을 지역주민들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 한 조건은 햇수로 3년째 이어오고 있는 <수요공연>이라는 공간이다. '우리는 노동자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성서노동자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수요공연>'은 성서공단노동조합(성서공단의 노동자라면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는 지역일반노조)과 금속노조 대구지부, 성서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사회운동단체, 그리고 대구지역 문화운동역량들이 머리를 맞대어 기획한 정기공연이다.
 
성서공단의 노동자들에게는 '노조가 생기면 회사가 망한다'는 인식이 퍼져있다. 노조를 설립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용주들은 어김없이 고의부도와 폐업으로 기업자체를 정리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사업은 처음부터 난관속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공단 안에서는 노동자들을 접촉하기조차 힘들다는 것이었다. 사업장 출입자체가 불가능하고 관리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노동자들은 유인물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 일이 끝나면 통근버스를 타고 공단을 빠져나간다. 그래서 노동자들을 안정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은 공단 밖, 그들의 주거단지였다. 성서지역은 한쪽은 공단, 한쪽은 대규모 아파트 주거단지로 이루어진 곳이다.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저녁 무렵 아파트 단지 주변의 상가와 시장, 공원 등지에서 물건을 사고 술을 마시며 바람을 쐰다. 동네 공원은 이들을 불러모을 수 있는 훌륭한 장소였던 것이다.
 
매년 5월~9월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빠지지 않고 매주 수요일날 공연이 열린다. 대구지역 문화패들의 노래, 몸짓, 풍물, 연극 등이 무대에 올려지며 공연팀들은 공연 사이사이에 노동자들과 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들, 사회적 쟁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대 옆에는 노동상담부스가 설치되어 있고 민주노총과 함께하는 대구지역 노무사들이 순번을 정해 임금체불, 산업재해 등의 상담활동을 벌인다.
<수요공연>에 오는 주민들은 더 이상 이 공연이 무슨 공연인지 묻지 않는다. 공연시작 앰프가 울리면 주민들은 공원으로 들어오는 여러곳의 출입구로 당연하다는 듯 행렬처럼 꾸역꾸역 몰려든다. 유모차를 끌고오는 부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 어린이부대, 아예 가족단위로 돗자리와 먹거리를 가지고 와 자리를 친다. 출연하는 공연팀에 대해 꿰고 있는 고정관객과 열성관객들도 상당하다.
<수요공연>을 통해 노조가입율이 크게 높아졌다거나 성서공단의 노동기본권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든지 하는 가시적인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회나 시위, 일회성 문화행사에 익숙한 이들 불온단체들이 3년동안 이 공연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다만 그 3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변화 중 확실한 것은, 성서지역에 있는 운동단체들에게 확실한 선동의 연단이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영상물을 통해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 일반시민들에게까지 노동자들이 처한 근로조건과 삶의 조건의 열악함을 공유하고 노동자들의 투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훌륭한 상영과 선동의 공간임에 틀림없다.
 
퇴근후 TV나 보다가 잠들어버리는 노동자들, 문화생활이라고는 동네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이나 기울이는 것밖에 없는 노동자들을 공원으로 불러모아 보자. 노조조직율이 10%밖에 안되는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가 무엇인지 알 기회조차 가지지 못하는 수많은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훌륭한 교육의 장소가 될 수 있다. 노동자들의 파업이 경제에 주름살만 늘린다며 호들갑을 떨면서도, 도대체 왜 이들이 파업이라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주류미디어에 대항하는 대안미디어운동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서둘러 동네공원을 돌아볼 것을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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